왜 성공한 남자들은 모두 ‘삑사리’를 낼까? 최근 대화를 나눈 40대 중반의 두순언니(가명?대학교수)는 “범생이로만 살아와서”라고 분석한다. 욕망을 관리하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한다는 건데, 최근 단속에 걸린 포털 사이트의 각종 ‘스폰 카페’에도 이른바 ‘성공한 남자’들이 꽤 많은 고객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식이 부모에게 평생 떠는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사람이 평생 해야 할 ‘연애 총량의 법칙’도 있을 것 같다. 벗겨지는 머리만큼, 처지는 뱃살만큼, 세월이 아쉬운 이들이 못다한 청춘의 꿈을 꿔보는 거, 나무랄 일은 아니다. 난 오히려 그게 뭐든 스스로 감당할 수 있고 반사회적이지만 않다면 독려하는 편이다(물론 스포츠로 푸는 것도 한 방법…). 안타까운 것은 성매매를 연애라 착각하는 것이다. 거래를 사랑이라 여기는 것이다.
오세훈 시장은 자전거 열심히 타고 남산 잘 가꾸고 아리수 관리만 잘했어도 박수 받았을 텐데, 뭐가 그리 조급했을까. 스스로 구국의 최선봉에 서 있다고 믿을 만큼 이번 무상급식 반대 승부에 집착한 걸까. 바람대로 결과가 나온들 정책 소관상 밀고가기도 어려울 텐데 말이다. 어쩌면 늘 ‘이기는 삶’을 위한 근성만 길러와서가 아닐까. ‘보란 듯이’ 해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삶의 태도는 많은 어른 남자들이 뒤늦게 제 욕망 앞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첫째 원인이다. ‘다섯살 훈이’의 경쟁심과 생떼는 보듬어야하지만 어른 남자의 그것은 치유 혹은 치료의 대상이다. 특히 권력자가 그러면 사회적인 비용이 너무 크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은 조용기 목사의 성공가도에 엄청난 ‘삑사리’를 내고 있다. 장로회 사람들은 그동안 조 목사만큼은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가족의 압력에 힘들어하신다’는 식으로 동정했는데, 최근 그가 교회 재산과 운영권을 놓고 가족편을 들자 당황하고 반발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조 목사는 최근 설교에서는 “(교회 사랑의 증거로) 누가 더 많이 헌금을 냈는지 계산해보자”고 결정적인 ‘입말’을 날리셨다. “우리 집사람이나 애들이 도둑놈은 아니다”에서 더 나아갔다. 어쩌면 그도 ‘영적 지도자’의 삶(으로 보이는 습속)에 총력을 다해오느라 제 안의 ‘헌금 계산자’의 욕망은 미처 돌보지 못한 게 아닐까. 자기가 믿는 방식의 교회 사랑에 매진하느라 정작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한 딱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