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방을 정리하다 스무살 무렵의 사진 몇장을 발견했다.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모아두는 편도 아니라서 20년 전 사진 속의 내가 낯설게만 보였다.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참 많이 변했더라. 사진 속 모습보다 주름이 늘어난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표정도 참 많이 바뀌었다. 마음 같아선 스무살 때의 내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까운 지면을 사진으로 낭비할 수 없기에 말로만 설명하자면 (지금에 비해서 젊고 잘생겼지만 사진 속의 내 표정은) 참 우울하다. 분명히 웃고 있는 얼굴인데 뭔가 침울하고 울적한 기운이 사방에 안개처럼 피어 있는 게 눈으로도 보인다. 사진 속에다 말풍선을 달아본다면 ‘흥, 아무도 날 이해할 수 없을걸’쯤이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스무살 때는 ‘이해’를 믿지 않았다. 누가 누군가를 이해했다는 말, 누군가가 나를 이해한다는 말,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모두 거짓이라 생각했다. 모든 관계가 가식적으로 보였고, 사람들의 모든 웃음은 비웃음처럼 들렸고, 사람들이 드러내는 슬픔은 과도해 보였다. 그 시절엔 음악도 헤비메탈이나 우울한 포크록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헤비메탈 음악의 인기가 높기도 했지만 사람들과 나 사이에다 음악 벽을 만들기엔 그보다 좋은 음악이 없었다. 세상에 메탈리카의 <And Justice For All>보다 더 좋은 벽을 어디서 찾겠나.
마흔(한살)이 된 지금도 ‘이해’를 믿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결론은 여전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언젠가 완료될 수 있는 명사가 아니라 영원히 진행할 수밖에 없는 동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이해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여전히 결론은 같지만 바뀐 건 많다. 20대의 나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지었지만 40대의 나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위로’라는 단어를 새롭게 알게 됐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위로할 수는 있다.
이렇게 많은 위로의 방식들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행동이 ‘위로’라고 생각한다. 위로는 죽으려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완전히 알지 못해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위로’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위로’의 ‘로’는 애쓴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위로하기 위해 애쓴다는 뜻이다.
이해를 믿지 않고 우울했던 스무살의 청년이 소설가가 되었다는 건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을 텐데, 더 우울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웃기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아, 이번주에는 한번도 못 웃기고 끝낼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 인간의 마음과 관계를 묘사하는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행이다.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래도 명색이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니) 문장이야 틀리지 않게 쓸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도 얕고 관계에 대한 통찰력도 부족한 내가 제대로 된 소설로 누군가를 위로하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지금도 그 의문은 여전하고, 좋은 소설가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론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의 위로가 있으며 (예술이 위로를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위로를 위해 여러 명의 예술가가 필요하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방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등을 토닥인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체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떤 예술가는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지만 바깥에서 이렇게 외친다. “놀자!” 나는 아직까지 방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등을 토닥여줄 자신이 없어서 밖에서 같이 놀자고 소리를 지르는 쪽이다. 언젠가 나도 방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겠지만 아직은 밖에서 불러내는 쪽이 마음 편하다. 울고 있는 게 마음 아프지만 바깥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본 영화 <써니>에서 유호정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껴안아주듯, 혹은 드라마 <아일랜드>의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어린 시절의 자신을 만난 것처럼) 스무살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방 안에 틀어박혀 우울해하는 나에게 위로를 해야 한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 (“이 자식, 너는 내가 잘 안다.”) 밖에서 “놀자!”라고 소리치는 대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갈 거다. 스무살 차이가 나긴 하지만 피차 ‘이해’ 같은 건 믿지도 않는 사이니 긴말할 필요없다. 나는 스무살 먹은 나의 귀를 붙들고 밖으로 끌어낸 다음 ‘옐로우 몬스터즈’의 공연에 데리고 갈 거다.
그래, 세상은 재미있는 곳이었지
옐로우 몬스터즈의 공연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단 한순간도 쉴 새가 없고, 한눈팔 새가 없다. 일단 공연이 시작되고 나면 끝날 때까지 한숨에 달려간다. 신나게 날뛰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곡이다. 그들의 장르는 펑크록이라고 불리지만 내가 보기엔 노는 록이다. 관객을 잘 놀게 해주고, 자신들도 잘 놀고, 아무튼 몰입도 최고다. 세상에,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수줍기만 한 사람들인데, 어쩜 그렇게 살벌하게 놀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
대기실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너무 한가로워 보여서 놀랐다. 공연을 앞둔 사람들 같지 않았다. 긴장이나 초조함 같은 건 집 냉장고 냉동칸에 넣어두고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아마 세 사람이 그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오랜 시간 연습을 하고 수많은 공연을 거치면서 긴장을 덜어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옐로우 몬스터즈는 앨범을 두장밖에 내지 않은 신인 밴드지만 (공연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데다) 멤버들은 각각 ‘검엑스’(이용원), ‘마이앤트메리’(한진영), ‘델리스파이스’(최재혁)에서 오랫동안 밴드 생활을 한 사람들이다. 어깨에서 힘 빼는 법을 알 만한 사람들이다. 모두들 말은 쉽게 하지만 어깨에서 힘을 빼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어깨에서 힘을 빼려면 우선 어깨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강하지 않은 어깨에서 힘만 빼버리면 어깨가 함몰되고 만다. 강한 어깨를 만든 다음 그 어깨에서 힘을 빼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옐로우 몬스터즈 역시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밖에서 “놀자!”고 외치는 쪽이다. 그들은 참 신나게 놀면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나도 잘 유혹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 스무살의 나를 데리고 옐로우 몬스터즈 공연에 가고 싶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잘 놀아야 잘 유혹할 수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즐겁기만 한 곳이 아니란 걸 안다. 세상이 무서운 곳이라는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도 필요하고, 직접적인 위로가 필요한 사람도 많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직접적인 위로를 하려고 한다면 아마 세상은 재미없게 변하고 말 것이다. 옐로우 몬스터즈처럼 열심히 놀면서 ‘아, 세상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었지’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예술가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더 열심히 놀아주세요. 옐몬!
첫 번째 앨범보다 강력해졌고 다양해졌다. 이들의 진가는 공연장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집에서 앨범을 틀어놓고(볼륨은 당연히 최대!!) 혼자 날뛰는 것도 좋은 피서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