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에서 금발로 등장하는, 살인자 유이치 역의 쓰마부키 사토시.
삶의 미스터리 구만구천구백개 중 하나.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는 ‘삽질’의 원인제공자는 자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회의는 3분 앞으로 다가왔는데 기획안은 달랑 두개가 될까 말까 한 상황. 어지간히 배짱이 좋지 않은 이상 ‘개수라도 늘리자’ 하는 심정으로 말도 안되는 기획안을 써내려가기 십상이다. ‘빨강, 초록, 오렌지 등 강렬한 컬러들이 하반기에도 인기를 끌 전망이다. 문제는 이런 컬러들이 검은 머리카락의 동양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 이에 동양인에게 어울리는 컬러 활용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근데 삶의 미스터리 구만구천구백개 중 또 다른 하나가 뭔지 아나? 세상의 모든 상사들은 부하 직원들이 ‘설마 이걸 하라고 하겠어?’라고 생각하며 개수나 채울 심산에서 낸 기획들에만 반응을 보인다는 거다.
가진 거라곤 배짱뿐인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애당초 ‘분량 조절용 기획안’ 같은 건 쓰지도 않지만 이런 기획이 내게 주어진다면 잡담으로 페이지 대부분을 메우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 왜? ‘검은 머리카락에 어울리는 오렌지색 활용법’ 따위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봤자 별게 없으니까. ‘컬러풀한 아이템이 유행이라고 그걸 꼭 입으라는 법은 없잖아요?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는데…’식의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해 페이지를 메울 수 있는 한 메우는 게 (비겁하지만) 최선책. 그렇다고 내용이 아주 없으면 안되니까 몇 가지 활용방법을 제시하긴 해야 할 터, 본론엔 이렇게 쓴다. ‘검은색 머리카락 가까이에 새빨간색을 배치하는 건 위험 부담이 크니까 컬러풀한 옷을 꼭 입고 싶다면 가급적 하의로 선택하라. 이때 상의는 옅은 색을 골라야 안정감있어 보인다. 주절주절….’ 끝은 이렇게 맺으련다. (여기가 포인트!) ‘컬러풀한 아이템을 꼭 입어야겠다면 머리 색깔을 바꿔 보는 건 어떠세요? 금발 강추!’
컬러풀한 옷의 유행 때문일 수도 있지만 요즘 나는 내 주변 금발머리들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타고난 머리색을, 그것도 원래 색과 비슷한 계열이 아닌 금색으로 바꾼다는 것은 미용의 목적을 넘어 일종의 상징성을 띠는 행위 같아서…. 유전자를 거스르고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갖겠다는 반항심의 표현이자 내가 속하도록 운명이 정해준 종족이나 집단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나 집단에 소속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느껴진달까. 보는 이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곳(머리카락)을 누가 봐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게 바꾼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면 금발로의 변신이야말로 남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받고픈 욕망의 표출인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덧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내 주변 사람들이 안쓰러워지고 걱정스러워진다(내 이런 걱정이 와닿지 않는 분들은 <악인>을 보시라. 특히 쓰마부키 사토시가 데이트 사이트에서 만난 여자에게 무시당하는 부분, 그중에서도 쓰마부키군의 눈빛에 주목!!).
바꿔 말하자면… 만일 당신의 마음이 요즘 ‘제발 날 좀 봐줘’와 ‘건드리기만 해봐!’라는 두 생각으로 요동치고 있다면, 게다가 요즘 유행하는 컬러풀한 상의를 자유자재로 소화하고 싶다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수많은 시도 중에서 금발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