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여름이 오면 도시는 문을 닫는다. 슈퍼마켓도 문을 닫고 약국도 문을 닫고 영화관도 문을 닫는다. 일주일에서 이주일 예정으로 긴 휴가를 떠나는 도시인들과 휴가를 떠나지 못하더라도 햇빛 좋은 주말이면 바다나 산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도시는 주인이 없다. 텅 빈 도시엔 관광객과 노인, 애완동물밖에 없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이탈리아 여름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황량한 도시 웨스턴 한편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 이탈리아에서는 여름에 영화를 개봉하는 것은 자살시도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7월 개봉한 이탈리아 독립장편영화 한편을 주목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피가 섞인 미카엘 잠피노 감독의 첫 장편 <에레데>(L’erede-The Heir)다.
미카엘 잠피노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에레데>는 아버지의 죽음 뒤에 수수께끼 같은 유산을 물려받은 남자 부르노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전혀 존재를 몰랐던 저택으로 찾아가고,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에레데>는 스탭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무료로 기부하고 봉사한 초저예산 영화다. 그러나 저예산이라고 얕잡아봐서는 안된다. <에레데>는 최근 이탈리아 장르영화들이 상처, 치유, 회한 등 삶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주제로 삼아왔던 것에 비해 걸음이 대단히 빠른 누아르적 스릴러영화다. 관객으로 하여금 빠른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는 듯한 환상에 빠지게 만드는 영화랄까. 인물들의 에너지 역시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으면서도 결코 상투적이지 않고, 또 이야기는 관객의 기다림을 끊임없이 유발한다. <에레데>의 감독인 미카엘 잠피노 감독을 직접 만나서 이 매력적인 저예산영화의 비밀을 들어봤다.
시간 많아 꼼꼼히 정성 들였지
미카엘 잠피노 감독
-데뷔작인데,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스탭과 배우들은 자신의 능력을 투자하는 의미로 제작에 참여했다. 우리는 문화부와 지방자치의회, 각종 협회와 단체의 문을 두드렸고 아주 어렵게 문화부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게 됐다. 사실은 지원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가 첫 촬영 들어가기 며칠 전에야 알게 됐다. 제작비는 1억원이 조금 넘었고, 촬영에는 24일이 걸렸다. 아주 괜찮은 저택을 공짜로 빌렸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많은 실험을 해봤다. 촬영 첫날에는 이미 배우와 스탭들이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이렇게라도 제작을 마쳤으니 다행이지만 제작을 마친 뒤에도 넘어야 할 산이 아주 많았다. 그래도 관객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고 나니 힘이 조금 나는 것 같다.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집을 물려받았다. 집 물려받은 이야기를 미국인 친구에게 하던 중에 스스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 중 하나만 꼽는다면, 시간이다. 영화의 시간. 영화를 준비하는 시간. 영화를 대하는 시간. 나는 시간이 많다는 게 장점이다. 시나리오, 로케이션 등 디테일한 부분에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에 내 시간을 열심히 투자한다면 영화 자체는 검소하더라도 내 의욕은 말이 평원을 만난 것처럼 힘껏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이 영화를 어떻게 보던가. =관객은 영화가 음향을 다루는 방식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영화가 리듬감이 있다거나 편집이 잘되었다거나 하는 기술적인 칭찬은 둘째치고라도 오래간만에 종합적인 스릴러를 볼 수 있었다는 칭찬들이 가장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