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처음 갔을 때 놀란 일 중 하나는 지하철 승객 중 상당수가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 놀랐던 건 그중 많은 부분이 만화였다는 사실. 고등학생 또래부터 초로의 신사까지, 만화 단행본이나 만화 잡지를 뚫어져라 읽는 모습을 보며 ‘이것이 일본 문화구나’란 생각을 했더랬다. 일본 문화에 정통한 김봉석 선배의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중심은 만화”라는 말이 실감난다. 멀리 도쿄까지 갈 것도 없이 홍대 앞 한양문고의 서가만 보더라도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 게임의 원작이 된 일본 만화, 그러니까 망가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학원멜로물에서부터 추리, 판타지, SF까지 장르도 다양하고, 요리부터 의학, 법률, 운전, 심지어 술과 도박에 이르기까지 온갖 분야를 심층적으로 다루니 일본 사람들에게 망가란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된 듯하다.
일본영화가 망가에 눈독을 들이는 건 당연하다. 망가 원작이 이미 대단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가진데다 단단한 독자층까지 확보하고 있는 판이니 영화로 옮기기만 하면 대박이 날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망가 원작 영화 중에는 졸작이 많다. 이번 특집기사를 보면 답은 나온다. 김봉석 선배가 지적한 대로 제작위원회 시스템이나 시장의 문제가 있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해석’의 문제가 가장 큰 게 아닌가 싶다. 망가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그 핵심을 영화적으로 차용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이들 영화는 ‘영화적’이 아니라 너무 ‘만화적’이다. 확고한 영화적 비전을 갖고 있는 미이케 다카시 같은 인물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망가 원작 영화는 만화를 적당히 영화로 번역하는 데 머무는 것 같다. 시나리오가 큰 결함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다. 꿰지 못하는 게 문제이지 서말의 구슬이 있다는 건 대단한 일 아닌가. 망가라는 방대한 세계가 뒷받침하고 있는 한 일본영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는 셈이다. 조재현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과 시나리오작가들이 대화에서 지적했듯, 한국영화계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생산하는 데 있어 힘겨운 구조를 갖고 있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쓸 수밖에 없는 것도 그런 구조에서 비롯된다.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의 힘이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시작된 건 사실이지만 이런 시스템은 안정적이지 않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분야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쓸 수 있고, 많은 각색가들이 다채로운 원작을 영화로 옮기는 일이 활발하게 병행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작가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크레딧을 보호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지겹게 하는 말이지만 한국영화계에서 3D보다 훨씬 중요한 건 시나리오다. 게다가 우리에겐 망가라는 화수분도 없잖은가.
ps. <씨네21>이 새로운 얼굴을 맞이했다. 상근객원기자인 남민영씨와 객원기자인 윤혜지씨가 그들이다. 두 객원기자가 <씨네21>에 새 기운을 넣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