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엘리야 우드)은 죽을 준비를 하면서도 한없이 찌질하다.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유서는 세번이나 고친 뒤에야 프린트했고, 의사인 누나가 처방해준 위약(僞藥)을 신경안정제라고 믿으며, ‘죽음의 셰이크’를 만들면서도 저지방우유과 단백질파우더, 유기농 바나나는 잊지 않았다. 모든 준비를 드디어 마친 라이언, 셔츠 단추를 목까지 잠근 반듯한 정장 차림으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데, 새 아침이 훤하게 밝더니, 평소 흠모해온 이웃 제나가 급한 사정이 생겼다며 애견 윌프레드를 맡기고 간다. 그런데 이 개는 그냥 개가 아니다. 라이언의 눈에 보이는 윌프레드(제이슨 간)는 어린이용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자가 입을 법한 동물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다. 문제는 라이언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 다른 이의 눈에 보이는 윌프레드는 까다로운 호주산 성견일 뿐이라는 것. 황당한 의인화는 그 정도의 점잖은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거짓말에 능한 것이 윌프레드의 의인화에서 부각되는 사람에 가까운 면모라면 개코로 냉장고 안의 우유가 상하는 냄새를 맡고, 5km 밖에서 암컷 래브라도 두 마리가 성교하는 소리를 듣고, 아무 데서나 볼일을 보고, 곰인형만 보면 붕가붕가를 하려는 등 성견의 습성도 가지고 있다. 윌프레드를 둘러싼 아이러니한 설정을 적나라하게 포착한 순간은 윌프레드가 주인인 제나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부비는 장면이다. 라이언과 시청자의 눈에는 공중파 방영이 부적절한 성인용 장면으로 보이지만 제나는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런 윌프레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쉴드> <저스티파이드> 등 남성 시청자를 겨냥한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쌓아온 케이블 채널 <FX>에서 최근 첫 시즌 방영을 시작한 <윌프레드>는 호주에서 시즌2까지 방영된 동명의 TV시리즈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코미디다. 오리지널에서 동물옷을 입고 윌프레드를 연기한 제이슨 간이 리메이크에서도 호주 억양이 진하게 묻어나는 말투로 라이언을 가지고 논다. 원작에서 라이언의 역할은 간의 절친한 친구이자 <윌프레드>를 함께 만든 애덤 츠바르가 연기했다. <윌프레드>는 두 친구의 경험에서 싹을 틔운 프로젝트다. 여자친구의 애완견이 자신에게 유독 적대적이었다는 츠바르의 일화와 동물옷을 입은 배우들이 극장 밖에서 담배도 피우고 욕도 하던 모습이 재미있어 눈여겨보았던 간의 기억력 만난 2001년의 어느 날, 두 사람은 400만원가량의 자비를 투자해 7분짜리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2002년 호주 트롭페스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코미디상과 최우수남자배우상을 수상했고, 2007년 TV시리즈로 만들어졌다.
원작이 츠바르와 여자친구의 개가 친해지는 과정을 그렸다면 리메이크는 라이언과 제나를 커플이 아닌 이웃으로 설정하고, 매사에 소심하고 유약한 라이언의 성격을 강조해 남녀관계에 집중되었던 테마를 인간관계로 확장했다. <윌프레드>의 한 에피소드는 30분이 채 되지 않지만 행복, 수용, 두려움, 존경 등 인간사의 키워드를 은유와 풍자, 익살을 통해 그려낸다. 그런 의미에서 에피소드의 문을 여는 짧은 아포리즘은 에피소드의 함축이나 다름없다. “제정신과 행복은 불가능한 조합이다.”(마크 트웨인) “두려움은 쓸모가 있으나 비겁함은 그렇지 않다.”(마하트마 간디). “오직 자신을 믿어라. 그래야 다른 것들로부터 배신당하지 않으리니.”(토머스 풀러). 그렇게 라이언이 윌프레드를 만나 겪는 일탈의 모험은 삶의 조언으로 다가온다. 정작 제이슨 간이 말하는 <윌프레드>는 훨씬 단순하지만 말이다. “두 수컷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어쩌다보니 한쪽은 사람, 한쪽은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