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일어나거라!” 어머니는 곤히 잠든 나를 흔들어 깨웠다. 밖에선 세찬 빗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대문 앞에 모래 자루를 쌓아놓고 바가지로 물을 연방 퍼냈다. “안되겠어. 저 앞 개천에 가보자꾸나.”
당시 우리 집은 서울 안양천의 지류인 목감천 언저리에 있었다. 2층으로 지어올린 양옥집의 지하 셋방이었다. 개천을 건너면 경기도 광명시였다. 주변 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개천에선 심한 악취가 났다. 개천에 도착해보니, 물은 거칠게 불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흐르는 강물의 세찬 흐름이 무서워, 난 그저 울었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졌다. “개천 수위가 높다. 하수가 역류하겠어.”
그때, 알았다. 홍수는 비가 많이 와서가 아니라 물이 빠지지 못해 역류하면 발생한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재빨리 이불·옷가지·전자제품 등을 2층 주인집으로 옮겼다. 덕분에 우리 집은 꽤 많은 살림살이를 건질 수 있었지만 몸만 빠져나온 이웃들은 세간 전부를 버려야 했다.
지난 7월27일 서울 강남 일대에 한 시간에 최대 113㎜의 비가 쏟아졌다. 서울의 하수도 시설은 쏟아지는 비를 받아내지 못했다. 주변보다 지대가 낮은 서울 강남역 사거리가 침수됐다. 자동차들이 검붉은 흙탕물 위로 둥둥 떠다녔고, 삼성 본사 직원들은 “아예 헤엄쳐서 출근을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남쪽. 공원 만든다고 앞뒤 재지 않고 파헤친 우면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렸다. 산사태는 부자나 빈자 모두에게 공평했다. 부자들이 사는 서울쪽 토사는 주변 고급 아파트쪽으로 쏟아져 여러 인명을 앗아갔다. 과천쪽에 산재한 비닐하우스촌에도 토사가 흘러내려 7월28일 현재 남태령 전원마을에서만 주민 6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됐다. 경기도에서도 팔당호가 가득 차 개천이 지류로 역류했다. 신문들은 ‘물탱크 된 강남, 주변 하천수위 올라 빗물 역류한 듯’ 등의 제목을 뽑아 이날 참사를 보도했다.
1925년 7월, 조선 역사상 최대 홍수로 기록된 을축대홍수로 서울·경기·강원의 사망자는 404명에 달했다. 유실·매몰·침수된 전답의 면적은 21억평을 넘었다. 당시의 홍수 대책은 한강에 제방 쌓기였다. 4대강 사업이 완성되면 전국 주요 하천은 거대한 댐과 보로 막하게 되는데, 물이 역류한다면 이제 우린 어떻게 될까.
필자의 사정으로 이번 호까지 <한겨레> 길윤형 기자의 칼럼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