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염의 시대를 KO시킨 거인, 전설이 되살아나다
<알리>의 기자 시사회가 있던 늦가을 저녁,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맨해튼 거리를 종종걸음으로 걷다 친구와 나눈 휴대폰 통화 한 토막. <알리>의 시사회에 간다했더니, 썰렁한 유머인 양 TV시리즈 <앨리의 사랑만들기>(원제가 Ally McBeal이다)가 영화화됐냐고 묻는다. 철자가 다르다고 얘기하기 앞서,`레오나르도`가 다빈치가 아니라 디카프리오를 연상시키는 세대에게 무하마드 알리는 너무나 먼 존재다. 사실 나 역시 언젠가 올림픽 점화식에서 파킨슨병으로 손을 떨며 서 있던 처연한 모습말고는 무하마드 알리를 본 기억이 없다. 가끔 60년대를 다룬 TV다큐멘터리에서 얼굴을 보기는 했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전설의 권투선수, 60년대 격동기에 흑인 인권운동에 참여했다는 정도가 시사회장으로 가는 도중 무하마드 알리에 관해 떠올릴 수 있는 전부였다. 친구의 무지를 탓할 일이 아니다. 영화개봉을 기다리라고 할 수밖에.
11월28일, <트래픽>을 제작한 이니셜 엔터테인먼트 그룹 제작, 윌 스미스 주연, 마이클 만 감독의 <알리>가 해외 기자들에게 첫선을 보인 시사회 장소는 5번가 소니 빌딩에 자리한 뉴욕 최고의 시사회장 `스크리닝룸`이었다. 시사회 하루 전까지 장소 결정을 지연시킨 주범은 바로 까다롭기로 소문난 마이클 만 감독이다. 애초에 시사회장으로 예정되었던 42번가의 한 극장을 갑작스레 취소한 것도 사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니, 그래도 최상의 조건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는 감독의 고집이 느껴져 은근히 기대를 더했다. 윌 스미스, 마이클 만,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만으로도 40여석 남짓의 스크리닝룸을 메운 각국 기자들에게 이야깃거리는 충분했다. 과연 윌 스미스가 알리 역을 어떻게 해냈을까. 사회성 이슈를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해온 마이클 만 감독이 논쟁의 대상이었던 알리를 어떤 식으로 그려낼까. 그리고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질문, 과연 무하마드 알리는 누구인가.
스턴트 없이, `진짜` 경기를 보여준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강렬하지만 애잔한 샘 쿡의 R&B가 흐른다. 라이브 재즈 클럽에 가득 찬 흑인 여자 손님들을 열광하게 하는 음악은 밤거리를 조깅하는 알리의 발길에도 넘쳐흐른다. 10여분간 흐느끼는 리듬만큼 카메라도 미끄러지며 알리의 유년 기억을 담아냈다. 도입부 10분간 주인공은 대사 한 마디 없건만, 알리가 좋아했다는 샘 쿡의 블루스는 그 검은 매력을 한껏 뽐내며 영화 한편을 다 본 듯한 느낌마저 준다. 백인감독 마이클 만이 무하마드 알리를 만들어낸 흑인 정서를 이렇게 섬세하게 포착할 줄은 예상 밖이다.
영화는 1964년에서 1974년까지, 알리가 처음으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딴 날부터 부당하게 빼앗긴 타이틀을 다시 되찾는 조지 포먼과의 경기까지 10년을 아우른다. 사건의 전말은 결국 두번의 중요한 권투시합이다. 그런데 두 사건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세상은 시끌시끌하여 미국이 베트남 참전을 선언하고, 버클리대학에서 학생운동이 시작된다. 흑인인권운동, 여성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도 이 시기이다. 비틀스가 미국을 평정하고, 말콤X가 암살당한다. 역사책 한 챕터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이 숨가쁜 시대의 한복판에 무하마드 알리가 있다.
22살에 세계 챔피언이 된 무명의 캐시어스 마르셀루스 클레이가 `무하마드 알리`로 태어나는 과정이 <알리>가 그려낸 10년이다. 마이클 만은 보여주기만 해도 파란만장한 이 10년을 그보다 더 역동적인 화면으로 2시간30분에 담아냈다. 두번이나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오른 에마누엘 누베즈키의 MTV 같은 현란한 영상은 무하마드 알리가 실제로 거쳐간 곳을 따라 6개 도시, 4개 주, 3대륙으로 옮겨가며 이 풍운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주인공은 역시 윌 스미스다. <맨 인 블랙>에서 입담 좋고 약간은 촐싹거리는 윌 스미스를 생각하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변신이다.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무하마드 알리가 되기 위해서 16kg을 늘리고, 운동선수의 몸을 만들기 위해 갖가지 운동에다 모래자루를 차고 산을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부분. 2시간30분 동안 윌 스미스는 알리가 되어 그야말로 스크린을 나비처럼 누빈다. 알리가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권투시합 장면은 바로 그 전설적인 `나비처럼 날고 벌처럼 쏜다`의 실체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이클 만의 악명 높은 `꼼꼼함`은 권투시합 장면에서 진가를 발한다. 실제 경기장의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조명, 담배 연기로 자욱한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옮긴 건 말할 것도 없고, 현란한 발동작, 잽싼 펀치가 진짜라는 건 권투에 문외한인 관객도 눈치챌 정도다. <알리>에 등장하는 상대 선수들은 모두 진짜 프로 권투선수들이 연기했다. 스턴트도 쓰지 않고, 실제 권투시합을 요구한 마이클 만 감독의 완벽주의 때문에 윌 스미스가 몸고생을 한 보람이 있는 듯하다. 링에 오르기도 전에 상대 선수 소니 리스톤의 기선을 제압하고 마는 입담도 소문대로 만만찮다. 발음전문가와 혹독한 훈련을 거쳐 알리의 말투를 고스란히 재현해냈다는 윌 스미스에게 무하마드 알리의 실제 부인도 속아넘어갈 정도였다니. 힙합 래퍼다운 윌 스미스의 순발력이 한껏 빛을 발한다.
이슬람교로 개종, 징집거부, 타이틀 박탈, 그리고…
이 화려한 순간이 지나자 논쟁의 순간이 이어진다. 챔피언을 딴 이튿날, 캐시어스 클레이는 이슬람교로 개종한다고 선언하고, 당시 흑인 이슬람계의 지도자 엘리자 무하마드가 지어준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까지 바꾼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알리는 오랜 기간 절친한 친구였던 말콤X와 결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콤X는 암살당한다.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결국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한 `인간 알리`의 투쟁의 이야기라도 해도 지나치지 않다. 흑인 노예 시절 백인 주인이 붙여준 성을 따르고 싶지 않아서 본명을 버린 것이나, “알라가 죄없는 사람을 죽이라 가르치지 않았고 베트남 사람들이 손톱만큼도 해를 끼친 것이 없으므로, 내가 베트남 사람을 죽일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한 것은 지금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로 솔직한 자기 주장이다. 최초로 백인, 흑인을 막론하고 스타 운동선수가 된 이 흑인 권투선수의 겁없는 이런 행보들은 결국, 타이틀 박탈, 재판회부, 파산 등의 시련으로 이어진다.
비록 심각한 사건들이지만, 링 밖에서도 거침없이 입담으로 승부를 보는 알리인지라 영화는 시종일관 불꽃이 튄다. 특히 존 보이트의 연기가 돋보이는 명스포츠 해설자 하워드 코셀과의 기이한 우정은 톡톡히 양념 구실을 한다. 만나기만 하면 입싸움을 벌이지만 실제 하워드 코셀은 공공매체에서 처음으로 `무하마드 알리`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란다. 그것 때문에 평생 항의와 습격까지 받았지만, 끝까지 알리의 신념을 지지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장면, 1974년 자이르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흑인 프로모션 챔피언전은 영화의 대미이자 `무하마드 알리`의 완성이라고 할 만한 순간이다. 32살의 노장 알리는 당시 최고의 권투선수로 불리던 조지 포먼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흑인 관중 앞에서 일대 격전을 치른다. 모잠비크에서 3만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해 촬영된 권투시합 장면의 스케일도 스케일이지만, 실제 74년의 시합을 일일이 프레임마다 그대로 옮긴 권투시합 장면은 그 열기가 스크린 바깥으로 뿜어져나올 것만 같다. 그렇게 한 시대가 갔다.
5년의 기획 끝에 마이클 만 프로덕션까지 포함해 무려 6개의 프로덕션이 참여하고, 할리우드 스타 윌 스미스를 1년 반 동안 트레이닝에 묶어둔 영화 <알리>는 주류 할리우드에서 흑인 소재를 다룬 영화들과는 전례를 달리하는 스케일을 자랑한다. 마이클 만 감독이나 출연진 모두 흑인들의 영웅인 무하마드 알리를 제대로 영화화해냈다는 자부심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위대한 것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는 마이클 만 감독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알리>는 들인 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비쩍 마른 윌 스미스가 과연 제대로 알리를 연기해낼까 하는 기우는 시사회장에서 이미 오스카상 후보 가능성 소문이 돌면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이클 만도 윌 스미스가 없었더라면, 영화를 찍지 못했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하마드 알리 본인도 이 영화가 자신에 관한 유일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승인했다는 전언. 알리의 첫째 부인 역에 윌 스미스의 실제 부인이기도 한 제이다 핀켓 스미스, 두 번째 부인 역에 마빈 게이의 딸 노아 게이, 알리의 매니저이자 친구 역에 <라이드 위드 데블>의 제프리 라이트, <애니 기븐 선데이>의 제이미 폭스, 안젤리나 졸리의 아버지 존 보이트 등 실력있는 출연진 못지않게 아카데미상 후보에 한두번씩 오르내렸던 스탭들도 일류급이다.
실수도 숨기지 않는 극사실주의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전기물이 흔히 그렇듯, 이미 알려진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흡인력은 다소 떨어진다. 영화 몇편을 만들고도 남을 이야기의 분량 때문인지,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도 가끔 등장한다. 특히 두번에 걸친 이혼은 그의 신념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미진한 구석이 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온 기자들도 문화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흑인 관객과 비흑인 관객이, 시대적 배경에 지식이 있는 관객과 없는 관객이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은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는 마이클 만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다. 제프리 라이트가 재치있게 지적하듯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20개 넘게 만들어졌는데, 무하마드 알리를 소재로 한 영화가 또 만들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면, <알리>가 모든 질문에 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은 알리가 지나온 그 격동의 시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다.
마이클 만 감독은 두번 다시 만들어지지 않을지 모르는 무하마드 알리의 이야기를 영화화한다는 의무감에, 주관적인 해석이나 일반적인 영웅담보다는 알리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을 `극사실주의`로 표현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평소 완벽주의로 소문난 그의 스타일이 영화의 사실성을 살리는 데 기여한 셈이다. 한편 알려진 사실을 미화하는 대신 실수들도 숨기지 않고, 알리의 인간적인 면모를 냉정하게 짚어낸 솔직함도 살 만하다. 굳이 사전지식이 없더라도, 사후지식을 습득할 마음이 없더라도 판타지물의 틈새에서 오랜만에 보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로서 <알리>의 매력은 충분하다. 2000년대의 한국 관객이 무하마드 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흥미롭다. 한국개봉은 2월8일이다.
뉴욕=옥혜령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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