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동안 제주도에 다녀왔다. <내 농장은 28번가에 있다>와 주말 여행이 교차한 지점은 생물 전복을 먹던 순간 일어났다. 나는 일행의 지시에 따라 전복에 고추장을 끼얹은 직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꺽!”). 전복이 월미도의 디스코팡팡처럼 껍데기 위에서 몸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살아 있어도 너무 살아 있잖아. 식도락 여행의 일행은 M씨와 W씨 부부였는데, 남편인 M씨는 살아 있는 전복을 입에 넣고 한입에 해치운 뒤 내장까지 쪽쪽 빨아먹은 다음 전복 껍질을 향해 두손을 모아 합장하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읊었다. 그 말을 듣던 아내 W씨의 일갈. “그런 합리화는 그만두라고!”
육식과 관련한 고민에는 580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육된 가축을 먹자는 사고방식에 관한 것이다. 기계식 현대 농업은 동물을 고기를 만드는 기계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는 비윤리적인 태도로, 초원에 놓아 키운 소와 방목되는 닭(제주도에서 옆집 놀러다니는 닭을 정말 목격했다), 자연의 순리대로 만들어진 유정란 등을 소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물이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해야 그 고기도 스트레스에서 자유롭다고. 하지만 이쯤 되면, 행복하게 살게 했으면 잡아먹는 대신 행복하게 자연사할 때까지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갈등에 빠진다. <타이타닉>에서 우리가 본 바대로, 사랑하는 이에게 우리가 바라는 최선의 삶이라 함은 늙어 죽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맛있는 고기를 건강하게 먹기 위해 동물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운다?
논픽션 <내 농장은 28번가에 있다>는 최근 유행하는 ‘먹거리 직접 키워봤소’ 장르다. 보통은 야채나 과일에 국한되지만 노벨라 카펜터는 ‘농장’ 운영을 시도했다. 돈이 부족한 그녀는 돼지의 식사를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 가축은 농작물과 달리 시끄럽고 냄새도 나는데 도심 한복판에 농장을 만들었으니 이웃의 원성도 보통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나 해프닝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 그렇게 교감하며 키운 동물들이 식용이라니! 카펜터는 키운 동물을 도살할 때, 죽는 순간까지 교감하려고 노력하고, 그 생명에 감사한다. 하지만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발상은 내 머리와 마음에서 자꾸 부대낀다. 어차피 육식을 멈출 수 없다면 카펜터처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육해서 올바른 방식으로 도축하는 것, 그 과정에 개입해 책임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는 동물 안 먹고 모르는 동물 먹는다고 더 우월한가. 하지만 그게 쉬운가. 육식을 멈출 수도, 살뜰하게 키워 잡아먹을 수도 없는 우유부단한 도시 여자인 나는 오늘도 고민에 빠진다. 타협안이래봐야 M씨의 말대로 그 생명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정도려나. 그나저나 직접 키운 동물을 먹을 수 없다고 칭얼거리면, 소는 누가 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