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죽어도 싸다는 사람이 있다. 동물원에서 토막 난 시체로 발견된 파울리. 그는 타우누스 지역의 도로 확장 공사를 끈질기게 반대해온 열혈 환경운동가로 누구에게나 겁없이 덤벼들었단다. 일단 지역 시장과 담당 공무원과 컨설팅 회사 연합은 이면 계약을 폭로한 파울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동물원 반대 운동을 한 까닭에 지역 동물원 사장과도 사이가 나쁘다. 이웃들도 마찬가지다. 쓰레기 투기나 고기 처리 문제로 고발당한 이웃들은 파울리가 너무 싫단다. 집 장사를 하는 전 부인과도 으르렁대는 사이다. 파울리가 근무하는 학교에는 시험 점수 때문에 파울리에게 원한 품은 남학생이 있다. 함께 극좌파로 어울렸던 녹색당 동료와도 뭔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혐의자 명단에 족족 올라가니 범인 맞히는 일은 초반부터 포기하는 편이 낫다. 대신 살인을 계기로 속내가 드러난 지역사회의 축소판을 경쾌하게 훑는 재미를 느끼자. 환경운동을 전선 삼아 갈라진 속물적인 어른의 세계와 반항적인 청년 및 운동가의 세계는 서로 승강이를 벌이지만 가족관계와 치정문제로 뒤엉킨다. 도로 건설 지역 정보를 빼내 주변 토지를 미리 사들이는 고위층 이야기는 친근하다. 그렇다고 진중한 사회비판 같은 걸 기대하진 말자. 냉혈한 회사 사장, 싸가지없는 부잣집 도련님, 연상의 애인에게 휘둘리는 배관공, 반항적인 컴퓨터 천재 등 그럴듯한 설정의 인물들이 시종일관 좌충우돌하면서 유머를 자아내는 가벼운 시트콤 같은 소설이므로.
등장인물이 워낙 많은데다 수사 담당 형사들의 가족 이야기, 연애 이야기까지 끼어들어 사건 자체만큼이나 관련 인물들의 개인 사정이 더 흥미롭다. 이혼녀 형사 피아에게 안정된 조건의 중년남과 불안한 성격의 꽃미남 청년이 동시에 구애하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피아에게 감정이입해서 로맨스를 쓰고 있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로맨스도 봐줄 만하다. 이 책은 타우누스 시리즈의 두 번째 소설로, 독일과 한국에서 성공을 거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