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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비주얼은 좋다고요? 확실해요?
김혜리 2011-07-22

백승우 작가의 <Seven Days> 연작 중 <Sunday Morning>(2010-11). 일요일 오전의 현금출납기. 작가는 장소와 상황에 대한 정보를 교묘히 지웠다. 그러니 이야기는 내 안에서 시작될밖에. 휴일 이른 아침, 나는 무엇 때문에 갑자기 돈이 필요해졌을까? 텅 빈 냉장고? 데이트? 전쟁?

6월27일

“이야기는 허술한데 비주얼은 뛰어나다.” 극장 출구를 나서면서 1년이면 줄잡아 마흔번은 듣는 말이다. 그리고 마이클 베이 감독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1편이 나온 2007년 이후 그런 부류 영화들의 종족 대표로 공인됐다. 3D로 만들어진 세 번째 <트랜스포머>까지 공개된 지금 나는 다만, “스토리는 별것 없지만 눈은 호강한다”는 우리의 입에 달라붙은 표현이 신중히 재고되길 바란다. <트랜스포머3>의 비주얼은 결코 뛰어나지 않다. 아니, 비주얼은 <트랜스포머3>의 가장 큰 약점이다. 무엇인가 눈앞에서 계속 번쩍이며 시신경을 자극하고 있을 뿐이다. 그 숏 다음에 왜 이 숏이 와야 하는지, 감독은 원래 고민할 의사가 없고 관객은 헤아릴 틈이 없다. 이미지를 영화의 형상으로 쌓아가는 작업에서 마이클 베이 감독이 보여주는 것은 영감이나 논리가 아니라 습관화된 매뉴얼이다. 그래서 극히 평범한 대화장면이나 이동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공회전을, 크레인은 비스듬한 활공을 각도까지 비슷하게 반복한다. <아마겟돈>까지만 해도 이같은 스타일은 조건반사적 아드레날린을 분비시켰지만 이제는 면역이 생겨 그조차 어렵다. 3편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1, 2편의 평으로부터 베이 감독이 수용한 부분이 있다면 전투 스펙터클의 흐름을 분별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해결책은? 슬로 모션이다. 154분 길이의 <트랜스포머3>는 “액션이 혼미하다고? 자, 이번엔 잘 봐”라고 말하듯 현시적인 슬로 모션을 대량 구사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늘어난 러닝타임의 주범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 본인의 인장과 비전을 반드시 새겨넣는 감독을 작가라 부른다면 베이도 작가의 일원이라 할 수 있으리라.

서두에 거론한 “스토리는 별것 없지만” 대목을 되짚어보자면 <트랜스포머3>는 이야기가 별것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또렷하고 복잡해서 탈이다. 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대해 만연된 착각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현대 시네마에서 할리우드 액션물만큼 두줄로 정리할 수 있는 선명한 서사에 집착하는 영화들도 없다. 엄밀히 말해 <트랜스포머3>의 서사적 결함은, 긴히 하고 싶은 말도 참신한 아이디어도 없는데 억지로 지어낸 이야기가 나쁜데다가 몹시 복잡다단하다는 점이다. 왜 복잡해졌을까? 거의 모든 플롯이 어떤 인물이나 로봇을 집어넣기 위해 더덕더덕 부가되었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인물이나 로봇은 섹시한 뒤태 숏을 보여주기 위해, 혹은 한번의 인상적인 특수효과를 전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선명하다는 의견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트랜스포머3> 대사의 많은 분량이 관객이 행여나 이야기를 놓칠까봐 염려한 나머지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고함쳐서 해설하고 있다는 사실(“다리가 무너지고 있어!”)만큼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소심한 개인적 소망 하나. 마이클 베이는 1편에서 후버 댐의 건립 동기를 바꿔놓더니 3편에서는 아폴로 11호 달 착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아무리 픽션의 세계에서 임의롭게 하는 일이지만 역사를 수정하거나 시카고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하는 대업을 벌이려면 좀더 그럴싸하고 흥미로운 근거와 동기를 제시하는 편이 영화팬으로서 나머지 세계에 덜 미안할 것 같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줄곧 함께한 배우 존 터투로는 베이의 연출 스타일을 묘사해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그는 문장을 매듭짓지 않는다”라고 간단히 답했는데 곱씹어볼 만한 표현이다.

6월28일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재미의 궁극과 엔터테인먼트의 본령은 ‘탈진’이라고 믿는 감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러고보면 ‘트랜스포머’는 본의 아니게 자기 반영적 제목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트랜스포머>는 혹시 자동차나 전자제품으로 위장해서 생활하는 극중 오토봇과 디셉티콘처럼 영화로 위장한, 영화 외계에서 온 다른 무엇은 아닐까? 이런 얼토당토않은 질문까지 떠올리도록 만든 걸 보면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적어도 투명한- 곧장 속이 들여다보이는- 기획이긴 하다.

반면, 오늘 오후 들른 아트선재센터에서 구경한 백승우 작가의 사진은 불투명함의 극치를 추구하는 시각예술의 예였다. ‘판단의 보류’라는 제목 아래 전시된 사진들은, 관람자가 해석의 단서로 삼을 만한 표면적 정보와 아이콘을 다양한 방식으로 철저히 지워내고 있었다. 벼룩시장에서 모은 수천장의 사진을 사람들에게 주고 무작위로 8점을 골라 연상되는 제목을 붙이도록 한 연작이 있는가 하면 직접 촬영한 사진과 아카이브 이미지를 이음새없이 합성한 시리즈도 있었다. 연작 <Seven Days>는 일곱 요일을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눠 촬영한 총 21장의 도쿄 풍경 사진으로 이뤄져 있는데, 각 작품에 부여된 제목은 촬영 환경과 전혀 무관하다. 즉, <월요일 밤>은 수요일 아침에 촬영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과는? 작품의 표면이 불투명하면 관객은 그 표면에 비치는 나의 반영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내 안의 이야기꾼이 할 수 없이 눈을 뜬다. 아스팔트의 물 얼룩을 포착한 <Sunday Night>를 보며 일요일 밤의 여흥 끝에 벌어진 승강이를 상상하고, 등받이가 닳은 지하철 좌석을 접사촬영한 <Tuesday Morning> 앞에서는 월요일의 피로가 남긴 흔적을 읽게 된다. <Seven Days>를 설명하는 인터뷰에서 백승우 작가는 우연히 엇나간 영화 관람의 기억을 회고한다. 영화 관객이라면 한번쯤 겪었을 법한 체험이라 솔깃했다. “이란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에 다른 영화의 자막이 들어간 거죠. 영어나 일어영화면 눈치라도 챘을 텐데 이란어이다보니 전혀 눈치를 못 챘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에서 ‘배고프다’라는 자막이 뜨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서기까지는) 어떻게든 연관을 시키려고 노력을 한 거죠.”

7월5일

어머니는 십년을 넘게 운전한 차를 오랫동안 개비하길 원했지만 막상 그 차가 폐차장으로 끌려가던 아침이 오자 아파트 입구까지 나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셨다. 무던하게 우리 식구를 실어 날랐던 그 하얀 차의 번호판은 이후로도 한참 가족의 각종 비밀번호 안에 남아 있었다. 자동차는 감정을 투사하는 데에 구태여 의인화가 필요없는 사물이다. 픽사의 <>와 <카2>가 그리는 세계는 그러나 승용차가 아니라 미니카들의 세상이다. 아이들이 손으로 굴리며 대사와 인격을 불어넣는 미니카 말이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 시리즈의 세계에서 차들은 자기들끼리의 사회를 굴려간다. 동물과 사물이 어떻게든 인간세상과 접점을 갖는- 그래서 우리를 깊이 웃기고 울리는- <토이 스토리> <라따뚜이> <월·E> 등의 다른 픽사 영화와 차별화되는 이 지점에 <> 시리즈의 맹점과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테면 <>와 <카2>는 차종의 개성을 인종이나 직업적 행태로 변환하는 대목에서 무궁무진한 재미를 안긴다. 히피들이 애용하던 폴크스바겐 미니버스는 유기농 연료의 신봉자라든지 페라리는 이탈리아 남자의 허세를 부린다든지 하는 부분이 그렇다. 압권은 재패니메이션 특유의 과도하게 귀여운 외모와 호들갑스런 화법을 가진 일본 차 캐릭터들이다. 문제는, 자동차가 인간처럼 군다는 신통방통함과 재미를 일단 괄호치고 이 캐릭터들을 모두 인간으로 환원해서 바라보면 <> 시리즈가 묘사하는 갈등과 에피소드가 보통 할리우드 실사영화의 평이한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약점은 본격 첩보액션 장르영화로 갱신된 <카2>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몰론 두말할 것 없이 이는 픽사의 자승자박이다. <토이 스토리> 이후 픽사가 축적한 성취는 ‘애니메이션치고’라는 조건절을 우리 마음속에서 영구히 지워버렸다. 픽사 작품은 각본과 연출 면에서 잘 만든 할리우드 실사영화 ‘못지않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실사영화가 좀처럼 따르지 못하는 깊이의 시나리오로 애니메이션만이 도달할 수 있는 시네마틱한 아름다움의 차원까지 열어보이는 영화로 이미 브랜드를 확립해버린 것이다. 조금만 속력이 떨어져도 견인차가 득달같이 출동할 판국이다. 누굴 원망하리오. 그러나 <카2>는 나쁜 작황이 예감되는 2011년 여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굳이 우열을 나누자면 여전히 우반에 속하는 엔터테인먼트다.

사진제공:아트선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