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봤다고 원작 소설도 다 본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과감히 접어두시라. 본 시리즈 원작 소설이니까. 알려진 대로 소설과 영화는 굵직한 설정만 비슷하다. 총상을 입고 바다에 떠오른 기억상실증 환자. 총기 분해를 능숙하게 해치우고 적의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할 줄 알며 넌지시 들은 정보만으로 배짱 좋게 계획을 세운다. 이쯤 되면 옛날에 무얼 하고 살았는지 겁날 지경이다. 사내는 두피 속에 숨겨놓은 계좌번호 하나만 믿고 과거를 찾아 떠난다.
영화와 소설의 공통점은 여기까지. 본이 맞서는 상대가 완전 다르다. 원작에서 본은 냉전 시기 악명을 떨친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 본명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라는 실존 인물과 싸운다. 1949년에 태어난 산체스는 아버지가 세 아들의 이름을 각각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라고 지을 만큼 광신적인 러시아 혁명 지지자였고 그 자신도 과격파로 자라나 무려 83명이나 죽였다고 한다. 요원 암살이나 비행기 납치 같은 큰 사건 뒤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고. 적수가 이런 인물인 만큼 소설은 영화처럼 미국 패권주의에 비판적이지는 않지만 대신 개인의 삶이 폭력으로 산산조각난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보여준다. 스파이물의 고전으로 손꼽힐 만하다. 실제 인물이 나오니 역사소설 읽는 맛도 난다.
사실적인 액션과 민첩한 카메라워크로 유명했던 영화 못지않게 소설도 현실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무대인 서유럽 곳곳은 묘사가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고 제이슨 본을 궁지로 몰아가는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절대 싱겁게 해결되는 일이라곤 없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 어떻게든 기억의 파편들을 이어붙이려고 안달난 제이슨 본의 모습은, 영화의 본과 겹친다. 상처받고 불안한 청년의 느낌이 났던 맷 데이먼의 본과 달리 원작의 본은 세파에 찌들고 잔인하기까지 하지만 한 가닥의 선함이 남아 있고 그 선함을 지키고자 하는 중년 남성의 고뇌가 느껴지는 캐릭터다. 둘 다 매력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