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시사IN>이 표지인물로 올린 스웨덴 복지국가 설계자 에른스트 비그포르스의 멋진 말.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행동 강령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강령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결정한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 아저씨 참으로 야무지게 좌우 넘나들며 끊임없이 수정을 해가며 ‘잠정적 유토피아’를 현실로 구현했다. 그것도 ‘정당정치’를 통해서.
비결은 단순하고도 치열하다. 완벽한 신세계(궁극적 유토피아)가 아닌 ‘이보다 좋은 세상이 분명 있을 텐데…’라는 절실함에서 미래의 총체적 사회상을 그려내고, 거기서 영감을 얻은 대중의 힘과 상상력을 모아 현실을 바꿔가는 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방식은 달라질 수도 새로 찾을 수도 있다. 가령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람을 잘라야 할까? 더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는 완전고용 사회를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대중의 꿈과 경험이 밑천이라는 점에서 ‘기회주의 정치’와 다르고 ‘이념적 도그마’와도 선을 긋는다. 굳이 따지자면 포퓰리즘이다. 새로 출발하는 진보정당에 강력히 권하고 싶은 참, 진, 원조, 포퓰리즘이다.
마구잡이 정리해고를 한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을 청문회에 세우겠다는 국회 방침이 나오자 경총은 이를 “사주에 대한 압력”으로 규정하고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행태의 연장선”이라고 비판했다. 포퓰리즘을 과거 빨갱이 딱지 같은 만능 처방전으로 쓰는 모양인데, 결국 ‘기업하기 좋은 나라’ 정책도 표를 많이 받은 세력에서 나온 거거든요.
전 서독 총리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타협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큰 조각의 케이크를 가졌다고 믿도록 아주 기술적으로 케이크를 자르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김진숙의 호소와 진보정당 분열의 시기를 “영혼이 반으로 쪼개져 있던 시간”이었다는 권영길의 눈물을 보면서 더 분명해졌다. ‘기술적으로 케이크를 자르는 예술’을 보여주는 정당이 필요하다. 지금껏 그 어느 정당도 보여주지 않고 시도조차 않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꿈까지는 아니라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걱정없이 놀러가는’ 삶을 꿈꾼다.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바란다. 이런 내 ‘잠정적 유토피아’를 구현해줄 정당에 기꺼이 한표 행사하고 지갑도 열 테야. 님과 함께, 겟 올라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