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달간 일 때문에 행복을 주제로 한 책을 여러 권 읽고 있다. 행복해지는 법을 참 많은 사람들이 궁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행복해지는 법을 설파하는 강사로 활동하는 사람도 많으며 그런 강의와 책을 통해 삶을 바꾸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다. 잘 먹고 잘 자야 한다는 조언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몰아내야 하므로 부정적인 사고나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든가, 웃음이 행복한 기분을 부른다든가 하는 조언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행복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그것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그 답은 어떤 천재적인 강사도 귀신 같은 통찰을 하는 책도 제시할 수 없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점점 오염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는 오염된 행복이라는 단어를 쫓는 현대인들의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응시한다. 단적으로 예를 들면, 부모님 세대에는 결혼해 아이 낳고 직장생활을 하면 “평범하게 잘 사는” 축에 들었지만, 이제는 결혼 상대의 외모, 그쪽 집안의 재력과 화목함, 신혼집의 평수, 아이는 순탄히 낳았는지 (돈과 시간과 정신적 집중을 요하는) 불임치료를 받았는지, 직장은 어떤 정도 수준인지, 정규직인지 계약직인지… 뭉뚱그려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말하기 힘든 매개변수가 수천가지다. 인터넷만 켜면 ‘더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금세 알 수 있으니 모두 지금 상태로는 불행을 느낀다. 그래서 <행복할 권리>는 손가락 사이로 영원히 빠져나가는 행복이라는 가치의 본질을 묻는다. 당연히, 정말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가 혹은 행복을 초월할 수 있는가 하는 논의도 들어 있다.
예컨대 이 책에는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의 이런 말이 인용된다. “어리석음, 이기심, 건강은 행복의 세 가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 어리석음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을 발전시켜 생각해보면 현실 직시는 행복이라는 정신상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한데,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가능성으로만 그 존재가 뚜렷해진다. 그래서 쇼핑과 여행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로 과장광고된다. 나아가 여가의 세계에서 쇼핑과 여행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순수한 가능성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능성의 중독자에게 모든 클라이맥스는 항상 동시에 안티클라이맥스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껏 언덕 꼭대기까지 굴려올린 돌이 다시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돌을 밀어올리기를 멈추어서는 안되며, 이 노동이 언젠가는 멈추어 영원한 행복을 느끼리라는 가능성을 믿어야만 한다. 믿는 행위에 의미가 있고, 찾는 행위에 진리가 있다. 영원한 가능성의 단어라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참 샤방해 보인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