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와 2회는 봤다. 3회부터는 도저히 못 보겠더라. MBC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얘기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보다는 ‘세살 재미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더 맞으려나)는 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대하는 나의 자세여서 어지간히 관심이 가는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면 4회까지는 꾸준히 지켜보는 편인데, 이건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더라.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고,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민망한 화면을 목격했을 때처럼 눈 둘 곳을 모르겠더라.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정말 노래 잘 부르는 가수들인데, 모두 좋은 노래들인데, 내가 좋아하는 개그맨들이 매니저를 해주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든 걸까.
그게 다 내 얘기 같아서 그런 거였다. 나는 가수가 아니지만 가수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는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평가를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탈락을 예감하며 근심하는 얼굴을 마음 편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거다.
<나는 가수다>의 소설가 버전이 있다면? 아찔해
<나는 가수다>가 워낙 인기있다 보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김중혁 작가님은 혹시 <나는 소설가다>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 섭외를 받게 되면 응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당대 최고의 작가 일곱명 중에 들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문학적 취향이 남다른 PD의 안목 때문에 섭외를 받게 되면 심정이 어떨까. 응할 수 있을까. 상상이 시작됐다. (전략) 오랜만에 만난 작가 일곱명은 한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미션을 받게 되는데, (짜잔) 미션의 내용은 다름 아닌 세계명작소설을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쓰기. 아뿔싸, 복불복 시스템으로 김중혁 작가에게 당첨된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걸 다시 쓰라고? 통째로? 읽는 것도 벅찬 <죄와 벌>을 다시 쓰기 위해 일주일 밤을 꼬박 새운 김중혁 작가는 청중평가단 앞에서 소설을 읽어내려가다가 그만 기절을 하고 마는데, 털썩… (후략)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PD님, 죄송하지만 저는 다음 기회에.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가수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건모를 김범수가 대체할 수 있을까? 이소라를 임재범이 대체할 수 있을까?
가수들에게 옛 노래들만 부르라고 하는 것도 가혹한 일이다. 누군가 불렀던 곡을 다시 부르게 하는 것은 인테리어가 모두 완성된 집에 들어가서 모든 걸 허물고 새로 공사를 하라는 건데, 공사가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다. 매주 이런 비경제적인 일로 가수를 혹사시키는 게 과연 그럴 만한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가끔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 ‘The Musician’처럼 빈 공간에 인테리어 공사하라고 했더니 완전히 집을 새로 지어버리는 바람에 보는 사람 감동의 눈물 쏙 빼는 공연도- 특히, 최백호씨와 함춘호씨와 심성락 선생님 말입니다- 있긴 있다만…).
그의 음악은 ‘원시음악’… 허공에 떠 있는 듯
30년 넘게 음악을 들어오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는 노래는 반드시 셋 중 하나에 속한다는 거다. 듣는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듣는 순간 선율이 만들어내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게 되는 노래가 있고, 어떨 때는 듣는 순간 먼 곳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노래가 있다. 첫 번째를 근시음악이라 부르며 두 번째를 투시음악이라 하고, 세 번째를 원시음악이라 한다, 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정했다. 하지만 노래 대신 가수가 또렷하게 보이는 노래는 절대 좋아할 수 없다. 야, 이 가수는 고음이 끝내주네, 이 가수는 또 어떤가, 기교가 아휴, 장난이 아니네, 그래, 노래를 참 잘 불러, 라고 생각할 때 그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이미 노래를 잡아먹어버린 거다.
내가 ‘루싸이트 토끼’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버스에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도 루싸이트 토끼의 노래만 나오면 나는 먼 곳을 봤다. 일산에서 버스를 타고 홍익대로 향할 때 손끝이 찌릿할 만큼 슬픈 <나에겐>을 들었다. 나는 합정역의 사람들과 그 너머의 거리의 풍경들이 일순간 멀어지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모든 게 아스라하게 느껴졌고, 나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노래만 들으면 합정역 앞의 풍경이 떠오른다. <손 꼭잡고>를 들을 때는 먼 곳의 맑은 하늘을 보았고, <꿈에선 놀아줘>를 들을 때는 별과 달을 보았다.
루싸이트 토끼의 쇼케이스를 진행하면서 나는 관객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오늘은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공연장 오른쪽 벽면이 부서지면서 먼 곳의 아스라한 풍경이 나타날 겁니다.” 실제로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상상마당도 어쨌든 다른 공연을 해야 하니까, 벽이 부서지는 공연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관객에게 먼 곳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상상하니까 벽 위로 하늘과 별과 달이 떴다.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을 듣기 시작한 지 3년째인데, 그들의 음악이 나와 함께 앞으로 걸어가고, 나와 함께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기분이 묘하다.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나는 그걸 느낀다. 나 역시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겠지. 우리는 어쩌면 음악들을 들으면서 우리의 변화를 실감하는지도 모르겠다. 음악과 함께 우리는 자란다. (3월에 발매된 싱글 <<Self>>에 이은) 그들의 세 번째 정규앨범이 나올 때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음악을 들고 나타날까. 나는 그 음악을 어떻게 듣게 될까.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새 앨범을 내길 기다리는 시간, 레코드 가게에서 CD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들의 음악을 상상하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음악을 듣는 시간이다. 귀에는 음악이 들리지 않지만 상상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들, 곧 만들어질 노래들, 수많은 뮤지션들 각각의 세계에서 쏟아져 나올 노래들, 그 노래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하다. 옛 노래들을 들으면서 오래전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아직까지는 내 주위의 수많은 뮤지션들의 새 노래를 기다리는 게 더 큰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