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부터 너무 달랐다. <애정만세>라는 이름의 옴니버스영화를 공동 연출한 부지영, 양익준 감독 이야기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는 양익준 감독이 사랑부터 정치까지 전방위 주제를 오가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면 ‘누나’ 부지영 감독은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양익준 감독의 말을 정돈해주며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식이었다. 그러나 얽매이지 않는 사랑 이야기를 다뤄보고 싶었다는 데에서 두 사람은 뜻을 모았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짝사랑하던 남자와의 추억이 담긴 산정호수로 무작정 떠나는 부지영 감독(<산정호수의 맛>)의 40대 여주인공과 낯선 30대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그에게 막무가내로 ‘대시’하는 양익준 감독(<미성년>)의 여고생 캐릭터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아 있다.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의 단편영화 제작지원 프로젝트 ‘숏숏숏’으로 <애정만세>를 처음 선보인 뒤 극장 개봉을 준비하는 두 감독을 만났다.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나. 양익준_2008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지영 감독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와 내 영화 <똥파리>가 상영됐는데, 그때 처음 만났다. 부지영_영화제 주변 거리를 배회하는데 손원평 감독이 소개시켜줬지. 익준이를 배우로 이미 알고 있던 터라 굉장히 반가웠다. 양익준_내가 그때 <똥파리> 편집실에서 침낭살이를 하던 때라 배낭 하나 메고 영화제 온 노숙자같이 보였을 거다. (웃음)
-<애정만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부지영_제안을 받은 시점이 당분간 작은 영화는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다. 그 직전에 국가인권위원회의 옴니버스 프로젝트 <시선 너머>의 단편(<니마>)을 연출했고, 중편영화 한편을 찍으면서 타이트한 제작비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애정만세> 연출 제안을 듣는 순간 ‘내가 이거 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오는 거다. 함께 연출할 상대가 익준이라는 점도 끌렸고, 멜로라는 장르를 유예해오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제안에 의해 새로운 도전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익준_나는 <똥파리> 이후 정말 영화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육체가 아픈 거면 깁스를 해서라도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진 상태라 쉬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다. 그래서 영화 연출이나 원고 제의나 심지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의 뮤직비디오 연출 제의도 거절했다. 그런데 도심에 사는 인간이다보니 잔가지 같은 욕망들이 자꾸만 생기는 거다. 뭔가 정말로 하고 싶다는 열정이 들어찼을 때 일을 시작하는 게 맞는 건데…. 인디스토리쪽에서 <애정만세> 건으로 연락이 왔을 때도 내 단순한 욕망 때문에 덜컥 수락을 해버렸다. 그 이후 6개월간 죽을 고생을 했다. (웃음)
-이야기를 들으니 두분 모두에게 도전의 의미가 강한 작품 같다. 그 도전의 결과를 자평한다면. 부지영_약간의 자신감이 생긴 것 같다. ‘부지영식 멜로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평소에 멜로 연출을 꺼려왔던 이유 중에 내가 과연 이 장르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캐릭터의 감정을 밖으로 표출한다는 게 왠지 부담스럽고 오글거렸거든. 밀고 당기는 로맨틱코미디보다는 사연있는 멜로를 만들고 싶었다. 이를테면 중산층 여인과 정원사가 사랑에 빠지는 더글러스 서크의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 같은. 사실 이 작품 때문에 잠시 중단한 두 번째 장편영화 시나리오가 멜로였다. 앞으로 그 작업을 다시 하게 될 텐데, 그때는 나만의 무드와 감정을 좀더 자신있게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양익준_나는 (연출을)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웃음) 내가 연출한 장·단편이 이번 작품까지 총 6편인데, 늘 내 안에서 차오르는 무언가를 뱉어내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똥파리>도 그래서 준비 기간이 만 5년이었다. 그런데 <미성년>의 경우 차오른 게 없으니 쓴물까지 뱉어내며 이야기를 완성해야 했다. 우물 안에 물은 없는데 손톱으로 땅만 잔뜩 파서 모래로 영화를 만든 격이다. 시나리오만 5~6번 엎었다. 엎은 작품 중에는 힙합 여고생과 공사장 인부와의 사랑 얘기도 있었고, 수산물 시장에서 생선 배달하는 사람 이야기도 있었고, 영화인들 술자리에서 남녀배우가 사랑에 빠지는 얘기도 있었다. 물론 이 캐릭터들이 모두 내 다음 영화들에 나올 자산이다. 언젠가 내 영화 안으로 쏙 들어와주겠지. 하지만 다음에는 나를 완전히 채운 다음에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
-부지영 감독은 멜로가 부담스러웠다고 했는데, 양익준 감독의 경우엔 작품의 전반적인 테마가 ‘사랑’인 것 같다. 양익준_우디 앨런의 <애니홀>에 이런 장면이 있다. 어떤 남자가 정신과 의사에게 자신의 형이 이상하니 도와달라고 한다. 형이 스스로를 닭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의사가 형을 데려오라고 하자 동생이 “그러면 달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안돼요”라고 한다. 그렇게 말도 안되고 황당한 것이 사랑이고 우리가 해야 한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 말에 공감한다. 짝사랑이든 중년의 사랑이든 여고생과 30대 남자의 사랑이든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가족’과 더불어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주제다. 부지영_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유교적인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한국은 특히 가족과 사랑을 파헤치다 보면 이 사회의 본질적인 부분을 안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병든 이파리(가족과 사랑)를 표현하면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징후를 볼 수 있는 거지.
-두 작품 모두 평범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산정호수의 맛>은 40대 싱글맘(으로 보이는)의 엉뚱한 짝사랑을, <미성년>은 흔히 ‘원조교제’라고들 부르는 여고생과 30대 남자의 관계를 다룬다. 부지영_익준이 영화도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사회적인 장벽이나 금기에 대한 요소들을 조명하는 걸 선호하는 것 같다. <산정호수의 맛>을 구상하며 40대 여성의 사랑을 다루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남편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다. 그저 혼자만의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은 한 중년 여성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양익준_다시 한번 우디 앨런의 예를 들자면 그는 자신이 입양한 아이(순이)와 결혼했잖나. 그런 그를 보면서 이 사람이 정말로 찾고 싶은 건 ‘사랑’이구나 생각했다.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결혼이나 나이 차이나 섹스가 곧 사랑일 순 없는 거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자꾸만 결혼을 하라고 하고, 애를 낳으라 강요하며 주변 사람에게 어떤 책임감을 요구한다. 이런 모습에 대한 답답함 때문인지 영화를 통해 진짜 사랑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욕구가 종종 발동하는 것 같다.
-<미성년>의 30대 남성-여고생 조합은 <똥파리>를 떠올리게 하는데. 양익준_솔직히 얘기하면 <똥파리>의 다른 제목이 <미성년>일 수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데 수두룩한 결함을 가진 남자와 가치관이 확고하며 극을 지탱하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니까. 내 영화는 어떻게든 여배우가 중심에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 편이 훨씬 흥미롭게 느껴진다.
-<산정호수의 맛>은 서주희라는 연기파 배우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영화다. 부지영_서주희씨가 이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나리오 쓸 때는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에 나오는 ‘로제타’ 캐릭터처럼 무표정한 얼굴의 여배우를 상상했었다. 그런데 캐스팅하려고 서주희씨를 만나보니 생각보다 감정의 진폭이 큰 분이더라. 카메라 앞에서 전혀 거리낌없이 모든 걸 보여주는 분이었다. 야외에서 애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치마를 탁 걷으시더니 남자배우에게 “자, 마음껏 주물러봐!”이러시며 오히려 굳어있던 분위기를 풀어주시고, 덕분에 감정을 30% 정도 열어두려 했던 영화가 80%를 오픈하는 영화가 됐다.
-<애정만세> 이후의 계획이 궁금하다. 부지영_서울독립영화제 <인디 트라이앵글>이란 프로젝트의 총연출을 맡게 됐다. 김꽃비, 양은용, 서영주, 이 세명의 여배우가 셀프 카메라로 자신들의 삶을 찍고, 내가 그 영상을 보며 프리뷰를 하고 방향을 잡는 방식으로 만들 예정이다. 양익준_나는 쉴 거다. 내가 뭘 하는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는 지점에 대해 올곧게 고민하고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하며 당분간 살고 싶다. 여러분도 각자 잘 사셨으면 좋겠다. (웃음) 부지영_너도 잘하세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