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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소년과 노인의 시간이 다른 것처럼
김혜리 2011-06-10

문 연 지 37년 된 동네 약국의 약장. 세월이 문지르고 간 자리가 반질거린다. 곧 가구를 개비한다는 소식에 아쉬워 카메라에 담았다. 잔병치레 많은 사람한테는 사탕가게 진열장 못지않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풍경이다.

5월16일

동물보호 옴니버스영화 <미안해, 고마워>는 호소력의 큰 몫을 “반려동물은 곧 가족”이라는 전제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동물의 생존권을 우선 그들이 인간과 얼마나 가깝고 비슷한 존재인지를 들어 설득할 수밖에 없는 우리 동물보호운동의 현황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미안해, 고마워>에 등장한 동물들은 주인과 같은 음식을 먹기도 하고, 돌림자를 이어받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때로는 어린이의 모습을 한 환영으로 등장한다. 여기엔 동물은 당연히 인간이 되고 싶어 할 거라는 우리의 무의식적 가정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물을 사람과 동일시하는 데에서 도출된 동물 생존권 인식은 이내 한계에 부딪히는 것도 사실이다. <미안해, 고마워> 중 박흥식 감독의 <내 동생>에서 주인공 소녀에게 동생이었던 강아지 보리가 아기가 태어나자 “아이 있는 집에 동물 두는 거 아니다”라는 의견에 밀려 버림받는 광경은 직접적인 예다. “개를 키우다간 인간이 필요없어질 것 같아 친구와 애인을 만든 다음에나 기르겠다”는, 오점균 감독의 <쭈쭈>에 나오는 대사도 같은 맥락이다. 동물이 진짜 가족이냐 아니냐가 이슈가 되는 순간 동물은 불가피하게 불안정한 처지에 처할 수밖에 없다. 같은 주제의 프로젝트가 미래에 다시 제작된다면, 동물이 인간과 얼마나 닮았고 공감할 능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똑같이 고통을 지각하는 존재라는 전제에 기초해 생존권 존중을 역설하는 영화들이 아니겠는가 짐작한다.

이미 많은 상업영화들이 동물을 사랑스럽게 그리고 우호적으로 다루는 현실에서, ‘진보한’ 동물영화를 표방한 기획이 성취를 거두려면 좀더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이야기를 더욱 영화적인 화법으로 풀어야 한다. 후자의 기준에서 <미안해, 고마워> 중 가장 성공적인 단편은 박흥식 감독의 <내 동생>이다. 반려견을 누이동생으로서 사랑했으며 그를 잃어버린 경험이 평생의 방향을 결정한 여자의 이야기인 이 최루성 단편은, 감독의 장편 <인어공주>와 유사한 감정 구조를 보여준다. <인어공주>의 시간여행 모티브가 불러일으킨 안타까움의 효과를 여기서는 이중시점 장치가 이끌어내는 형상이다. 주제의 너비와 깊이 면에서 돋보이는 단편은 임순례 감독의 <고양이 키스>다. 도시의 길고양이들이 처한 환경과 동물에게 최소한의 도움을 주려는 개인이 부딪히는 편견을 적시한 <고양이 키스>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테두리를 넘어 동물과 인간의 공생을 생각한다. 더불어, ‘내 가족’을 이루고 지키는 데에 전력투구하는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이름 모를 거리의 동물과 사랑을 나누며 혼자 사는 <고양이 키스>의 여주인공을 통해 임순례 감독은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은연중에 주장하고 있다.

5월17일

관객으로서 경험을 돌아볼 때 20분 내외의 단편영화에서 이미 나온 장면을 다시 몽타주로 보여주는 플래시백이 나오면 맥이 풀린다. 경박하게 비유하자면, 없는 살림에 더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자칫하면 단편 러닝타임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빈약하거나 화술이 요령부득이라는 증거로 기억되기 십상이다.

5월19일

한적한 지하철. 가방에 읽을 거리가 없다. <베를린 천사의 시>의 다미엘이 된 기분으로 사람들을 훔쳐본다. 교복인지 아리송한 하늘빛 셔츠를 걸친 맞은편의 미소년은, 시간이 자신의 바람보다 느리게 흘러 지루해하고 있는 눈치다. 한두 사이즈 큰 농구화를 신은 발이 초조한 리듬으로 바닥을 두들긴다. 한칸 잘못 채워진 단추나 손등에 그어진 볼펜 자국은 안중에 없다. 예쁜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보는 빈틈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시시콜콜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신의 공평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런 자의식마저 없다면 그들의 아름다움은 너무 순정하고 완벽해서 치명적 효과를 낼 테니까. 조세핀 하트가 소설 <데미지>에 썼듯이 “진짜 아름다움은 곤란을 자초한다”. 옆자리의 백발 신사는, 볼펜을 꼭 쥐고 이미 색색 글씨로 빼곡한 무극수첩을 골똘히 들여다보는 중이다. 표지 안쪽에는 여백에 메모가 된 명함들이 소중히 붙어 있고, 모임과 상담 일정으로 채워진 월간 계획표 귀퉁이에는 단순 정보를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 연예인 커플의 이름도 보인다. 무엇보다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필체로 쓴 ‘人生二毛作’ 다섯자가 시선을 붙든다. 소년과 반대로 노인은 시간을 쪼개고 한 조각도 허투루 흘리지 않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누군가가 지하철 한 좌석에 나란히 앉은 일곱명의 승객을 카메라로 찬찬히 훑어보는 짧은 필름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제목은 <그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들>?

5월23일

한스 짐머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주제곡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자동 분비시키는 큐 신호가 됐다는 점에서 <스타워즈>와 <해리 포터>의 테마와 같은 반열에 진입했다. 문제는 음악이 고양한 흥분에 영화가 계속 불을 붙여갈 수 있느냐다. 한명의 스타 캐릭터가 영화의 존재감을 반 이상 책임지는 <다이 하드>나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시리즈에서 주인공을 처음 소개하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속편에서는 존 맥클레인 형사가, 잭 스패로우 선장이 어떤 포즈로 등장해 무슨 대사를 첫마디로 내뱉을 것인가 고대하는 일은 팬들에게 큰 도락이다. 유명 록밴드의 콘서트 오프닝과 매한가지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자루로 얼굴을 가린 용의자 잭 스패로우를 도입부에 보여주는데 특별한 서스펜스를 자아내지는 못한다. 관객의 눈에는 볼썽사납게 끌려다니며 구차하게 애걸하는 사내가 우리의 잭 스패로우일 리 애초에 만무해 보이기 때문이다. 중반 이후에도 4편은 잭 스패로우의 매력을 확장하거나 기존 캐릭터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본디 잭 스패로우는 문제의 해결사라기보다 멋대로 행동하다 얼떨결에 과업을 이루는 트릭스터고, 낭만적 개념의 천재다. 테마파크 놀이기구에서 비롯된 이 프랜차이즈에 고유함이 있다면, 잭 스패로우가 대변하는 해적스러움, 무정부주의적인 풍류일 터인데 4편은 더이상 그것을 표현할 아이디어가 고갈된 것처럼 보인다.

5월25일

매튜 본 감독의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까지 본 결과, 이 시리즈의 평점은 <엑스맨2> <엑스맨>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엑스맨: 라스트 스탠드>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순서로 큰 이견없이 정리될 듯하다(<나이트메어> 시리즈나 <할로윈> 시리즈의 부등식을 쓰는 것보다야 훨씬 수월하다). 냉전시대 배경 첩보영화로 스타일의 가닥을 잡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친숙한 캐릭터들의 전사를 무난히 복원했다. 또한 박력있고 흥미롭게 디자인된 마지막 액션 클라이맥스는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호감을 남기기에 족하다. 매튜 본이 1, 2편의 감독 브라이언 싱어를 따라잡지 못하는 대목은, 엑스맨들의 흉터이자 긍지인 다양한 초능력을 처연하고도 유려하게 장면화하는 솜씨다. 이미 관객이 알고 있는 내용을 확인사살하기 일쑤인 대사도 1, 2편보다 한수 아래다. “우리에겐 아직 강력한 무기가 남아있어. 그건 바로 나지.” 같은 대사는 아무래도 좀 곤란하다. 이언 매켈런의 매그니토에 비해 케빈 베이컨의 세바스찬 쇼우가 분한 악당 캐릭터의 위엄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 새로 소개된 엑스맨 가운데 초음파 고성을 내는 반시를 제외하면 그다지 인상적인 인물이 없다는 점도 아킬레스건이다. 결국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스타일만 복고적인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재미와 감흥 면에서도 1, 2편보다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처럼 투박해졌다. 물론 프리퀄의 핸디캡이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엑스맨 대 호모 사피엔스, 매그니토 대 자비에의 갈등이 초보적 형태(prototype)로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까. 동일한 과제를 받아 안았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가 발군의 프리퀄이었음을 새삼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