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호라는 스타가 있었다. 1997년 어느 기사에는 아예 “김지호 주식회사”라는 말이 적혀 있을 정도였다. 자동차, 화장품, 과자, 백화점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던 CF의 여왕이었고, <아파트> <8월의 신부> <로펌> <유리구두> 같은 드라마의 히로인이었던 그녀는 세상 도처에 나타났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연작에서 만난 배우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행복한 아내로 살았다. 그리고 또 어느 날, 브라운관 속에서도 엄마를 연기하는 여배우로 다시 등장했다. 바로 지난해 12월까지 아침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김지호를 새삼스럽게 보이도록 만든 건 영화 <미안해, 고마워>다. 지금까지의 영화 출연작이 <꼬리치는 남자>와 <연인>, 단 두편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미안해, 고마워>는 약 14년 만의 영화다. 비록 옴니버스영화 가운데 한편의 주연을 맡았고, 여전히 엄마와 아내를 연기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작품 가운데 가장 평범한 여성의 고민을 품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김지호를 오랜만에 만났다. 아니, <씨네21>과는 첫 만남이었다.
-사진촬영 때 보니 발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더라. =아이랑 놀아주다가 모서리에 부딪혀서 발톱이 들렸다. 다음날 바로 시사회에 하이힐을 신고 올라가야 하는데 정말 걱정스럽더라. 간신히 발을 구겨넣어서 무대에 올라갔는데, 자리를 옮기다가 발톱이 움직인 거다. 인상을 찌푸렸더니, 기사에는 김지호가 사이즈가 작은 신발을 신어서 아파했다고 나왔다. 억울했다. (웃음)
-<미안해, 고마워> 중 한편인 <고마워 미안해>에 출연했다. 다들 말하듯 14년 만의 영화다.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 =영국 여행 중에 연락을 받았다. 함께하는 감독님들이 너무 좋은 분들이더라. 송일곤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보니까 동물영화라기보다는 한 여자가 겪는 내면을 따라가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여자의 심리를 따라가는 작품을 너무 해보고 싶었다. 사실 드라마에서는 좀 불가능한 부분이니까.
-시사회에서 보니 어떻던가. =분량을 조절하느라 많은 장면이 빠져야 했다. 섬에서 찍은 장면에서는 삼촌을 연기한 이상훈씨의 코믹연기에 내가 말려서 나도 코믹연기 비슷한 걸 하기도 했다. 내가 맡은 수영은 상당히 신경이 곤두서 있는 여자인데, 그 장면에서 튀어 보이더라.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싶어서 처음에는 떨렸고 중간에는 창피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끝내고 나니 뿌듯했다.
-14년 만의 영화인 만큼 본인의 얼굴을 큰 스크린에서 보는 것도 14년 만이었을 거다. =내가 좀더 배우 같아 보였다고 할까? 송일곤 감독님이 워낙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게끔 연출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TV 속의 나보다 훨씬 더 편해 보였다. 이제부터라도 영화를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미 찍어놓은 작품도 있다. 정지영 감독님의 <정직의 대가>에서 기자를 연기했다. 가을쯤에 개봉할 것 같다.
-지금까지의 영화 출연작은 <꼬리치는 남자>와 <인연>이 전부다. 신드롬을 일으킨 스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도적으로 영화를 피했던 건 아닐까 싶더라. =막상 영화를 찍었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게 많았다. 그때 내가 뭘 알고 영화를 했었겠나. 특히 <인연>은 3일 촬영하고 교통사고가 나기도 했었다. 입안에 수술을 했는데, 도무지 표정을 지을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아예 나를 빼달라고 했더니, 당시 감독님이 배우가 꼭 얼굴로만 연기하는 건 아니라고 하시더라. 배우로서의 마인드를 가지라는 말씀이셨는데, 너무 어린 나이였고 내 얼굴을 보면서 자신감을 다 잃은 상태였다. 연기가 안되니까 속상하고, 현장에 가면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그 이후로 영화는 일부러 멀리 했던 게 있었다.
-그래도 배우로서 한번쯤은 영화에 욕심이 생겼을 텐데.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는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출연했던 영화의 성적이 별로 안 좋았다. 게다가 드라마와 CF에서 이미지가 굳어져 있었다. 영화가 나를 원할 때는 안 했는데, 막상 하려고 하니까 나를 원하지 않는 거다. 원래 나한테 들어오던 당시의 영화들은 대부분 노출을 요구하는 작품들이었다. 노출이 안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데, 내 몸이 노출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좌중 웃음) 진짜 아니다. 사람들이 화낼 거다. 아무튼 영화를 다시 해보려 했을 때는 꼭 주연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좋은 감독님과 좋은 시나리오, 좋은 배우들이 함께하는 작품이면 조연으로 출연해서라도 영화가 뭔지 익히고 싶었다. 하지만 기회가 맞지 않다 보니 먼저 들어온 드라마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본 영화 가운데 마음이 동한 작품이 있었다면. =(고민하지 않고) <봄날은 간다>. 극장에서도 몇번을 보고 DVD로도 자주 봤는데 항상 그런 영화를 하고 싶었다. 허진호 감독님 영화는 이후에도 다 봤다. 연기나 감정에 과장된 게 없어서 좋더라. 그러고 보니 <공동경비구역 JSA>도 영애 언니 영화네. 언니가 연기한 소피를 보면서도 내가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물론 영애 언니가 워낙 연기를 잘했으니까 그렇게 보였겠지.
-데뷔작인 <사랑의 인사>에서는 보이시한 여대생이었다. 여군도 어울렸겠다. =당시에는 내가 정말 이상하게 생긴 애였을 거다. (웃음) 그때는 정말 예쁘고 청순한 여배우들이 사랑받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 이후로는 <8월의 신부>에서처럼 비련의 주인공 같은 캐릭터를 더 많이 연기했다. =<8월의 신부>는 나도 정말 사랑하는 드라마다. 그런데 나도 내가 그런 여성을 연기하는 게 힘들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온갖 시련을 다 참고, 눈물 찍고 돌아서는데, 결국 누군가가 그런 서러움을 알아주는 과정을 겪었다. 내 성격상 이해가 안 가는 거지. (웃음) ‘아니, 그럼 안 만나면 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공감이 가고 마음이 아파야 하는데 화가 났었다. (웃음)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에게도 이런 여성스러운 느낌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더라. 25살까지는 통통 튀는 에너지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 이후로는 여성스러운 것에 맛을 들이게 됐다. 머리도 길러보고, 살도 빼보고, 옷도 섹시하고 예쁘게 입어보고. 결국 그러다보니 아예 색깔이 없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가진 기본적인 털털함밖에는 없는 것 같다. 사실 우리 남편은 만날 나한테 “으이그. 이 양아치…”라고 그런다. (웃음)
-최근에는 드라마를 통해 엄마, 아내를 연기했다. 생각해보니 조금은 의아하더라. 결혼하고 아이도 있지만, 아직 30대인데. =아예 어릴 때 결혼했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다 보니 연출자들은 시청자가 나를 어떻게든 유부녀로만 볼 거라고 단정짓는 것 같다. 나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아직은 좀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또 내가 워낙 철이 없어서 그런지 유부녀를 연기하는 나를 보고 있으면 뭔가 어색한 게 있다.
-연예인과의 결혼이 가져온 영향일 수도 있겠다. 만약 남편이 일반인이었다면 덜하지 않았을까. =맞다. 그게 마이너스다. 안 그래도 매니저가 한번은 둘이 함께하는 건 하지 말자고 했다. 배우는 만인의 연인이어야 하는데, 공개석상에서 김호진의 와이프로 나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부부 연예인이 함께 안 나서려고 하면 수입은 마이너스가 된다. CF 같은 건 함께 들어오는 게 종종 있으니까.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나서는 일을 안 했다.
-그러고 보면 아이를 낳고 복귀한 뒤에 출연한 <그래도 좋아> 같은 작품은 의외였다. 아침드라마인데 직업여성의 연애를 다루었다. =나도 그래서 선택한 드라마다. 사실 나에게 들어오는 작품들이 대부분 엄마 아니면 ‘돌아온 여자’, 주책바가지 등이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좋아>의 대본을 받았는데, 주인공이 아가씨고 구두디자이너인 거다. 그녀가 연애를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결혼하는 걸로 끝났다. 아이를 낳는 설정은 나오지도 않았다. 결혼 안 한 여성 캐릭터를 또 언제 해보겠나 싶었다. 미니시리즈에서 억척스러운 아줌마를 연기하는 것보다 기뻤다. 지금은 뭐 그냥 그런 거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때는 내가 그렇게 치부되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마워, 미안해>의 수영은 동물과의 만남을 통해 좋은 아내, 좋은 엄마, 결국은 좋은 여자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본인은 어떤 것 같나. =한때는 열심인 아내였고, 애를 낳은 뒤에는 열심인 엄마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아이와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척했던 게 아닌가 싶더라. 지금까지 사실상 내 위주로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주위 사람들은 일하는 엄마가 다 그런 거라고 하는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최근에야 내 삶을 다시 성찰하는 것 같다.
-지금 보내고 있는 배우로서의 삶도 함께 고민할 텐데. =배우로서는 좀 힘들다. 누구나 한번씩 슬럼프라는 게 있으니까. 내 안에서 뭔가 조급했던 게 있었던 것 같다. 좀 두려웠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이런 시기가 있기 때문에 또 한 계단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 잠시 천천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