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관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때로는 얼굴도 보지 않고 선입관을 갖는 경우도 있다.
‘상상초월 쇼케이스’의 사전미팅을 하기 위해 랍티미스트를 만나러 가는 길, 내 머릿속에는 한번 시작되어 도저히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 수많은 상상들이 날뛰고 있었다. 일단 만나면 욕 한두 마디 뱉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대화 중간중간에는 디스(diss)가 듬뿍 담긴 말씀도 해주시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는 “이런, 젠장, 이런 거 난 못해, yo”라면서 나가버리는 (도대체 뭘 상상하는 거니?)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는데, 카페에 도착했더니 아직 래퍼들이 오지 않은 관계로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벌써 열 받아서 가버린 거 아냐?)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았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좀 늦는대요.”
예비군 훈련? 아, 래퍼들도 예비군 훈련을 받는구나. 당연한 일인데 낯설기만 했다. 주인공 랍티미스트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지만 함께 만나기로 한 뮤지션 D.C(이 친구, 노래가 정말 예술이다!)가 예비군 훈련을 받고 온다는 거였다. 예비군 훈련을 받아봐서 알지만 거긴 자유로운 영혼들이 갈 만한 곳이 아니다. 하긴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는 건 군대를 다녀왔다는 건데, 래퍼들도 군대에 가긴 가야겠지. 나의 선입관과 한국의 현실이 충돌하면서 (래퍼들이 인사계나 주임상사에게 욕을 섞어 인사하고, 소대장에게 디스하는 군대장면은 도저히 상상 못하겠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자리에 나온 랍티미스트와 D.C는 어찌나 준수한 청년들이던지 이상한 상상으로 반나절을 보낸 나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모든 래퍼님들께 다시 한번 심심한 사과를.
비생산적인 생산의 20대
공연 직전에 예비군 훈련이 또다시 화제에 올랐다. 공연 다음날 래퍼 라임어택(이 친구, 랩이 정말 예술이다!)이 예비군 훈련을 받는다는 거였는데, D.C와 라임어택의 대화가 아주 들을 만했다. 실제 대화는 훨씬 리드미컬했지만 그걸 옮길 재주가 없는 관계로 평범하게 옮기자면, (편집장님, 이 지면에다 욕 쓰면 안되는 거겠죠?) 아래와 같다.
“야, 나는 군대에서 총 되게 잘 쐈어.” “나는 타깃이 보이지도 않더라.” “다른 애들은 사격 끝나고 나면 귀가 멍멍하다는데, 난 총 쏠 때 귀가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어릴 때부터 하도 음악을 크게 들어서 귀가 잘 안 들려. 하하, 총소리쯤이야 끄떡없지.” “나도 그래. 헤드폰 쓰면 한쪽 귀 잘 안 들려.”
듣고 있으니 웃음이 나면서도, 나름의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을 앓고 있는 젊은이들에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상상초월 쇼케이스>의 주인공 랍티미스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드렁큰 타이거의 여덟 번째 앨범 ≪Feel gHood Muzik: The 8th Wonder≫를 통해서였다. 이 앨범에는 좋은 곡들이 무수하게 많지만 내가 앨범의 백미로 꼽는 부분은 랍티미스트의 <skit(음악에 미친 Loptimist는 오늘도 밤을 새워)>와 이어서 나오는 <True Romance>다. <skit(음악에 미친 Loptimist는 오늘도 밤을 새워)>에는 랍티미스트와 랍티미스트의 어머니가 등장하는데, 그 대화가 눈물겹다(어쩌다보니 이번 달엔 대화 특집).
“혁기(랍티미스트의 본명)야, 지금 몇시니, 새벽 3시야. 만날 밤낮이 이렇게 바뀌어가지고….” “냅둬,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내가 알아서 한다고. 지금 이거 하는 거 다 생각하고 준비하는 거야.” “엄마는 답답하지. 동생은 취직한다고 자격증도 따고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데, 어떡할 거니. 엄마 친구들한테 할 말이 없어.” “엄마, 드렁큰 타이거 알지? 드렁큰 타이거가 나한테 연락했어.” “드렁큰 타이거가 너한테 왜 연락을 해. 널 뭘 보고?” “들어봐.”
들어보라는 랍티미스트의 목소리에 이어서 <True Romance>의 플루트 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랍티미스트와 이야기를 하던 중 그 부분에서 울고 말았다고 고백했더니 “형, 진짜요?”라며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인가? 난 그 대목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시큰거린다. 아마도 내 얘기 같아서 그랬을 거다. 내 얘기일 뿐 아니라 새벽 3시의 방구석에 틀어박혀 뭔가를 만들어내는 모든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고, 자격증 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이려는 비생산적인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귀가 상할 정도로 커다란 소리로 음악이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사람들이 보낸 외로운 시간들이 떠올라 마음이 시큰거리는 거다.
쓸모없는 생각이 쓸모를 찾는 시간
스킷에 등장하는 랍티미스트 어머니의 목소리는 본인의 것이 맞지만 실제 상황이 아니라 연출된 것이라고 하니 (게다가 음악 하는 걸 좋아하신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한데, 사실 주위에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저런 얘기 많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바로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하라”는 거였는데, 쓸데없는 생각의 결정체인 소설을 쓰며 살고 있으니 나름 반전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스킷 속 가상의 랍티미스트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어머니, 동생이 좋은 자격증으로 취직해서 열심히 회사에 다니다가, 갑자기 힘들 때, 인생이 고달플 때 아마 형의 음악에서 위안을 얻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그러니, 그냥 냅둬주세요. 그리고 들어봐주세요.”
랍티미스트의 첫 번째, 두 번째 앨범도 좋지만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앨범 ≪Lilac≫도 나는 참 좋다. 어떤 사람들은 랍티미스트가 변했다고, 너무 온순해졌다고, 사랑 이야기만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지만 나는 계단 같은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 서른살도 되지 않았다. 해봐야 할 게 너무 많고, 변해야 할 게 너무 많고, 실수하고 실패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며 갔던 길을 다시 되짚어와서 다른 길로 가야 할 때도 있을 테고, 믿던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때도 있을 것이다(없으면 다행!). 모든 20대는 천천히 길을 찾아야 할 시간이 필요한데도, 우린 가끔 그걸 잊는다. 뮤지션도, 예외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랍티미스트의 세 번째 앨범 ≪Lilac≫의 <나를 불러본다>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흐트러진 내 방 한구석에/ 숨어 있는 내 청춘/ 술에 취해 떠들었던/ 나의 꿈이여 어디에// 행복한 웃음을 뛰는 사람들의 어깨를/ 비켜가면서 조용히 걷는 나/ 그들 곁에 속할 자격이 없는 난/ 그 근처에서 아주 잠시 머문다/ 나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왜/ 아무도 날 못 알아봐 주는 거야 왜.” 모든 20대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고,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인데, 젠장, 19금 딱지가 붙어 있다. 노랫말에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보다. 욕이 절로 나오는데, 편집장님, 정말 욕하면 안되는 거죠? 욕하면, 이거, 잡지도 19금 되는 거죠? 참아야 하나? 래퍼님들, 욕이나 한 바가지 시원하게 해주세요,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