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영화광 A씨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 개봉영화가 상영 종료한 뒤 조금만 기다리면 (최신영화를) 다운로드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 3500원씩 내고 영화를 보는 합법 다운로더냐고? 그럴 리가요, A는 반문한다. 무료인데다가 법에 걸릴 위험이 전혀 없는 신세계가 있는데, 굳이 합법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기웃거릴 수고가 필요하냐고. 도대체 그 신세계가 무엇이기에? 정체는 토렌트다.
토렌트는 P2P 프로그램이다. P2P는 ‘Peer to Peer’라고, 사용자끼리 정보를 교환한다는 의미다. 토렌트는 사용자와 사용자가 정보를 교환하는 프로그램을 뜻한다. 웹하드의 경우, 사용자가 컴퓨터를 켜놓지 않아도 자신이 공유할 자료(영화, 음악, 방송 프로그램)를 이미 웹하드 사이트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다른 사용자는 언제든지 그 자료를 내려받을 수 있다. 반면 P2P는 컴퓨터를 켜놓은 사용자끼리 실시간으로 파일을 ‘주고받는’ 프로그램이다. 웹하드가 ‘(자료를 올리는) 업로더-(자료를 다운받는) 다운로더’의 구분이 명확하다면 토렌트는 그 구분이 모호하다. 가령, 현재 ‘씨네21i’가 합법 다운로드 서비스를 하고 있는 최신영화의 상당수가 토렌트 사이트에 불법 공유되고 있다, 고 가정하자(실제로 최신영화의 상당수가 토렌트를 나돌고 있었다). A, B, C라는 사람이 각자 자신의 컴퓨터 안에 한 영화를 무한대로 쪼갠 조각 파일을 저장하고 있다. D라는 사람이 그 영화의 공유를 요청하면 A, B, C 세 사람의 컴퓨터에 있는 조각 파일이 토렌트의 자체 프로그램에 의해 퍼즐 맞추듯 하나의 파일로 완성된다. 이런 식의 원리로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백만, 수천만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자료를 주고받는다. 사용자는 누군가의 업로더인 동시에 다운로더가 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조각 파일을 가지고 있을수록 다운받는 속도가 빨라진다.
관련 해외법조차 닿지 않는 쿠바 등지서 서버 운영
자료를 내려받는 데 사용자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무료다. 이는 (현금) 포인트를 노리고 업로드를 하거나 캐시를 결제해 다운로드를 하는, 돈이 오가는 웹하드와의 또 다른 차이점이다. 사용자들에게 돈을 받는 대신 토렌트는 사이트 배너 광고로 수익을 올린다. 다소 어려운 원리처럼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이 토렌트를 이용하냐고? 물론이다. 네티즌은 토렌트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토렌트의 기본 원리를 비롯해 다운로드 속도가 떨어질 때 대처 방법, 토렌트를 이용하면 컴퓨터가 바보가 되는 건 아니냐는 질문과 답까지 토렌트에 대한 모든 것을 묻고 답한다. 최근에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토렌트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한다. 때문에 영화, 방송, 음악, 만화 등 콘텐츠는 저작권에 대한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고 있다.
콘텐츠를 불법 공유했던 웹하드를 적발한 것처럼 토렌트 역시 단속하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다.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대부분의 토렌트가 서버를 국내가 아닌 해외에 두고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씨네21i’ 콘텐츠배급팀 전상준 팀장은 “불법 포르노 사이트처럼 토렌트 또한 국내 저작권법이 닿지 않는 해외, 그것도 저작권 관련 해외법 적용이 어려운 국가인 쿠바, 아프리카 등에 서버를 두고 운영한다”면서 “저작권 침해와 관련한 국내법 적용이 어렵다보니 토렌트의 경우 사이트 운영자를 처벌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웹하드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콘텐츠가 토렌트에서 불법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건 모순된 현실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10월 ‘웹하드 등록제’도 토렌트에는 무력화될 듯
이런 상황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저작권 보호과 홍승표 주무관는 3월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10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웹하드 등록제’를 주목할 것을 강조한다. 웹하드 등록제는 신고제로 운영됐던 기존의 ‘특수 유형의 OSP(온라인서비스제공자)’가 이제부터는 의무적으로 방송통신위원회의 등록절차를 거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저작권법을 위반하면 제재를 받는 내용의 ‘정보통신사업법 개정안’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규정하는 사업자 등록 요건은 4가지인데, 내용은 이렇다.
1. 저작권법 104조에 명시된 기술적보호조치, 즉 불법 콘텐츠 필터링 조치에 대한 시행 계획을 제출해야 하고 2. 업무 수행에 필요한 인적, 물적 기반을 구비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며 3. 재무건전성 확보 증거 자료 4. 사업계획서 등을 제출해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심사를 받아야 한다. 저작권법을 어길 경우 정부는 해당 사이트 운영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의 사법 처리를 한다. 한마디로 정부는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웹하드 사이트에만 사업을 허가하겠다는 말이다.
웹하드 등록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2월25일 합법 다운로드 서비스를 시작한 CJ E&M의 자회사 ‘엠바로’의 서진호 팀장은 말한다.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웹하드의 콘텐츠가 많아질수록 토렌트로 향하는 사용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지고 웹하드 등록제가 시행되는 10월에는 더욱 토렌트 사이트 이용자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웹하드 등록제와 별개로 자체적으로 필터링하는 기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씨네21i’의 전상준 팀장 역시 “이번 법안은 기존의 웹하드 합법 다운로드 사업에는 실효성이 있을지 몰라도 해외에 서버를 둔 토렌트 사이트에 대한 강제력은 거의 없다고 본다”고 우려하면서 “당장 필요한 건 정부의 ‘적극적인 토렌트 사이트 IP 차단’”이라고 강조한다.
문화체육관광부 홍승표 주무관은 “사실 영화계보다 방송계가 토렌트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최근 토렌트의 문제점을 다룬 한 언론 보도를 접하자마자 대표적인 토렌트 사이트를 모니터링했다. 그 결과 확실히 토렌트는 일반 웹하드와 운영 방식이 다르더라”면서 “일단 방송위원회에 63개의 토렌트 사이트에 대한 심의를 요청했다. 그 결과 토렌트가 직접적으로 콘텐츠를 불법 유통하는 건 아니지만 저작권 침해를 방조한 건 분명하다. 그래서 경찰청사이버수사대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에 요청해 해당 사이트를 곧바로 차단했다”고 설명한다. 또 그는 “해당 사이트 리스트를 요청하면 공개하겠다”면서 “분명한 건 저작권 권리자의 고소가 없으면 정부가 먼저 나서기가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필터링 강화·정부 대책은 기본, 인식변화가 급선무
토렌트를 막기 위한 영화계의 몇몇 움직임도 보인다. 엠바로는 콘텐츠의 구매자 정보를 해당 파일 안에 암호화해 심는 장치를 여러 웹하드 업체들과 함께 기술 테스트 중이라고 한다. 육안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장치가 상영화될 경우, 구매자는 자신이 구입한 콘텐츠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될 것이고, 웹하드 사업자는 콘텐츠가 불법 유통될 경우 누가 최초의 구매자인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콘텐츠의 유통 단계부터 철저하게 감시하겠다는 합법 다운로드 웹하드 업체의 강한 의지다. 엠바로의 서진호 팀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필터링 장치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장기적인 대책으로 보고 있다고.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는 토렌트뿐만 아니라 기존의 웹하드의 합법 다운로드 서비스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영진위 진흥사업부 김현정 과장은 “5월 중 합법 다운로드 업체들을 포함해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제작자, 수입자 등 영화인들을 모아 대토론회를 연 뒤 의견 수렴을 거쳐 6월에 토렌트를 비롯한 합법 다운로드 사업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계획이다. 그리고 이 사업을 2011, 2012년 영진위 역점 사업으로 추진할 것이고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토렌트 사이트에 대한 이런저런 영화계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토렌트 사이트를 처벌할 만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는 게 현실이다. 메이저 멀티플렉스 배급팀의 한 영화인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정부의 대책, 웹하드 업체들의 꼼꼼한 필터링 등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저작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 점에서 지금부터라도 어린이들에게 영화, 음악, 방송, 만화 등 콘텐츠들은 그 가치에 대한 합당한 지불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교육해야 한다.” 토렌트라는 변종 괴물에 맞선 영화계의 노력, 시작이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