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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어른들의 언어유희
이다혜 2011-05-05

<짜릿하고 따뜻하게> 이시은 지음 / 달 펴냄

두면 고물, 주면 보물. 매일 지하철에서 보는 광고 카피다. ‘아름다운 가게’의 광고인데, 내가 안 쓰는 물건이라도 새로운 주인을 찾으면 잘 쓰일 수 있음을 전달하는, 간략하고 명료한 카피다. 하지만 심성이 그리 곱지 않은 나는 늘 저 광고를 볼 때마다 ‘내 고물이 남에게 보물이 된다니! 아까워…’ 하는 생각에 잠긴다. 나는 재미 못 본 물건으로 남이 행복해한다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고로 산 옷이니 신발이니 화장품이니 하는 물건을 잘 쓰고 있으면서도, 나도 곧잘 팔면서도, ‘주면 보물’이라는 네 글자를 마주할 때마다 ‘아깝다!’는 마음에 부르르 떨고야 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힘이 강한 언어는 광고언어일 것이다. 지갑을 열게 하니까. 실상보다는 허상에 가까운 ‘이미지’ 장사의 절정에 해당하는 말장난일 때도 많지만(선거 포스터를 떠올려보라) 때로는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 깊은 곳 어딘가를 쿡 찌르고 간질이기도 한다. 카피라이터 이시은이 일본의 명광고 카피들을 소개하며 그에 얽힌 개인사를 풀어낸 에세이집 <짜릿하고 따뜻하게>가 흥미로운 지점은 산문보다 광고 카피들인데, 그럴 수밖에 없다. 광고 카피를 읽고 떠오르는 심상은 남의 글을 읽어야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통신사 NTT는 이렇게 말한다. “‘얘기하고 싶어서…’/ 이 이상의 용건은 없습니다.” 통신사와 (뻥 좀 보태) 억만년의 거리차를 둔 필기구 빠이롯트는 이렇게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사람은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비교우위를 논하는 게 아닌, 그 물건이나 서비스의 핵심을 파고드는 한마디. 산토리 위스키의 광고 카피들은 유려하기로 이름이 높은데, 야마자키나 히비키 같은 좋은 위스키에 어울릴법한, 향긋하고 알싸한 여운이 남는 표현이 줄을 잇는다. 그중 전설로 남을 법한 산토리 올드의 한마디. “사랑은/ 먼 옛날의/ 불꽃이/ 아니다.” 산토리 야마자키의 광고는 (농담 아니고) 당장 술친구를 불러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싶게 만든다. “정치학, 경제학, 문학, 연애론…/ 오늘도 어른들의 수업이 시작된다.” 마스터! 여기 야마자키 12년산 스트레이트로 한잔 주쇼!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와 언어 유희는 철도 광고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JR의 광고들이 대표적인데,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기차여행의 애틋함과 설렘을 대변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만나고 싶은 밤이 있습니다.” “징글벨을 울리는 것은/ 돌아오는 당신입니다.”

가장 재치있고 의표를 찌르는 카피는 바로 패밀리마트의 것이었다. “네가 있어, 사랑을 했다.” 가난한 연인, 바쁜 연인, 소심한 연인… 그들은 24시간 편의점이 마치 회전목마라도 되는 양 그 주변을 맴돌며 연애를 한다. 물론 콘… 콘… 콘… 그걸 파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콘칩 말고 다른 걸 상상하신 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