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5월 어느 날 회현동 골목길에서 사복경찰들에게 토끼몰이를 당했다.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를 외치며 남대문에서 시위하던 중이었다. 맞아죽기 전에 깔려죽겠구나 싶을 만큼 막다른 골목에 수십, 수백명이 몰렸다. 그날 내가 있던 바로 그 골목, 혹은 그 옆골목에서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질식사했다. 집회를 마치고 (정확히는 진압을 당하고) 비를 맞으며 학회 엠티가 예정돼 있던 장흥으로 갔다. 숙소는 귀곡산장 같았고 친구들과 나는 안도인지 분노인지 모를 혼란스런 감정으로 그 밤을 보냈던 것 같다.
하루가 멀게 분신 소식이 담긴 대자보가 나붙던 나날이었다. 동시에 바야흐로 문화대폭발의 시기였다. 데모를 하는 학생보다 데모를 하지 않는 학생이 훨씬 많았지만 집회 참여를 위해 수업을 째는 일은 당연했고 노동절 같은 큰 규모의 행사에는 교수들도 휴강으로 협조해줬다. 귀걸이를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남학생들이 학생회 간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던 ‘날라리와 투사의 공존 시대’이자, 동아리방에서 먹고 자는 떡진머리 무전취식생과 자가용 몰고 다니는 명품족 여학생이 로맨스를 낳기도 하던 그야말로 ‘계급 해방, 아니 계급 무시의 시대’이기도 했다. 과외를 갈까 철거 반대 투쟁을 갈까, 미팅을 할까 <해방 전후사의 인식> 세미나를 할까, 레드 제플린을 들을까 노찾사를 들을까, 선택의 연속이었다. 딱히 정의하지 않아도 분명한 맥락이 있었고 모두의 기억 속에 있지만 아무도 집단 후일담을 하지 않는 1991년.
그때 데모하지 않고 애를 만들어 낳았다면 그 애가 지금 딱 그때 내 나이겠다. 허걱. 그때 데모하지 않았으면 지금 데모할 뻔했네. 나는 그래도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은 마련할 수 있었다. 지금의 5분의 1 수준이었으니. 등록금 인하 투쟁에 나선 학부모들에게 무한한 고마움과 연대감을 느낀다. 내 아이가 대학에 갈지 안 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까지 신세 좀 지련다. 굼뜬 인간도 일이 눈앞에 닥치면 움직인다. 김남주 시인도 노래했잖아. “묻노니 그대에게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서 투쟁없이 자유가 쟁취된 적이 있던가.” 이건희 회장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내 유일한 노후대책인 국민연금이 이렇게나 많은 대기업에 이렇게나 아무런 주주권 행사 없이 투자돼 있으니 신경이 쓰인다. 국민연금이 제대로 관리·운용·지급되지 않으면 기꺼이 할머니 투사가 되리라. 1991년이 내게 남긴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