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100여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진 악몽의 세계보다 영화 엔딩의 자막, 즉 <안티크라이스트>를 타르코프스키에게 헌정한다는 내용의 자막이 더 당황스럽고 끔찍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희생>에서 자신의 영화를 아들에게 바친다고 썼던 그 자리에, ‘라스 폰 트리에’라는 (상징적) 아들은 자신의 (상징적) 아버지에게 <안티크라이스트>라는 거울상의 영화로 응답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의 진심이든 농담이든 간에(나는 진심으로 보는 입장이다), 그렇게 라스 폰 트리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타르코프스키에게 그가 구축하려 애썼던 세계의 뒤집혀진 이미지를 내민다. <안티크라이스트>와 타르코프스키 영화간의 전도된 연관성, 달리 말해 향수의 꿈을 위해 사용된 자연의 상관물이 악몽의 꿈으로 사용되고, 최후 희망의 징표로 남겨졌던 아이가 죽음을 맞으며 영화의 문을 여는 등에 대해서는 이미 정한석이 지적(<씨네21> 799호, “끔찍한 농담인가 극한의 예술인가”)한 이상, 이를 굳이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주목하려 하는 것은 <안티크라이스트>가 타르코프스키적인 상징뿐만 아니라 상징의 함축적 의미를 그와 상반된 것을 지시하기 위해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 글이 각각의 상징적 의미를 도상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의미로 고착화된 상징물에서 상반되거나 이탈된 의미를 마주하는 경험은 <안티크라이스트>의 ‘안티’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관문이다. 왜냐하면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상징적 체계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안티크라이스트>를 추동시키는 궁극적인 힘이며, 더구나 여성학살의 역사가 드러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만함에 히스테리로 반응하다
<안티크라이스트>는, 그리고 라스 폰 트리에는 일반적인 상징적 체계를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 없다. 부인은 남편에게 말한다. 당신이 자신의 논문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정말 천박한 논문이 되었다고. 마치 성경의 창세기에서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라는 표현을 상기시키는 이 대화는 <안티크라이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아이의 죽음 이후 부인은 혼돈에 사로잡히는 반면, 남성은 그 외부(그로부터 면죄된 자의 위치)에서 부인의 심리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명명’하려 한다. 에덴이라는 숲을 관객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논문에 대한 대화 직후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는데, 이때 라스 폰 트리에는 갑작스럽게 에덴 숲의 모습을 길게 삽입한다. 우리는 숲 이후, 그것을 바라보는 부인의 눈, 목, 귀, 헐떡이는 가슴, 떨리는 손, 뒤통수 등을 순차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숏의 배열은 잠시 뒤 다시 한번 반복되는데, 이때 남편은 이를 ‘불안’의 신체적 증상으로 ‘명명’한다. 남편은 부인의 심리적 혼돈을 체계화하기 위해 피라미드의 빈칸을 하나둘씩 채워나간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피라미드의 맨 위칸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남편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부인을 대신해 ‘나’(me)라고 쓰며 ‘그녀 자신’(herself)이라 말할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은 왜 여성은 남성의 언어에 의해 ‘나‘라고 서술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성은 스스로를 ‘나’로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언어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다는 것이다. 남성 지식의 산물로서의 여성.
부인 논문의 주제였던 중세시대의 여성학살(gynocide)은 남성의 언어에 의해 여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단죄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며, 이는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남편이 부인을 직접 치료하기로, 아니 구원하기로, 아니 조사하기로 결정했을 때, 남성은 부인의 고백을 자신의 지식으로 전유하고, 이를 통해 여성의 세계에 대한 표상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그것은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미명하에 여성을 자신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던 동력이다. 우리는 남편에 대한 부인의 린치가 바로 이 순간부터, 그러니까 남편이 부인을 대신해 ‘나’라고 쓴 직후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성이 부인의 혼돈을 하나의 체계로 정립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순간, 부인은 자신의 광기를 폭발시킨다. 즉, <안티크라이스트>는 실제를 특정한 무언가로 규정하려는 상징적 행위 또는 그 오만함에 대해 히스테리로 반응하는, 달리 말해 대타자(상징적 체계)에 대해 의심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명명의 행위는 <안티크라이스트>가 여성혐오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오해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라스 폰 트리에가 동일시하는 인물은 남편이 아닌 부인이다. 그는 부인의 위치, 달리 말해 대상을 명명하는 자가 아니라, 그렇게 명명된 대상 세계 앞에서 질식할 듯한 고통에 직면해 있는 자의 위치에서 상징적 명명 행위의 주체를 바라본다. 즉, 죽은 새끼를 출산하는 노루나 똬리에서 떨어져 죽은 새들의 모습 등을 통해 에덴(숲)이라는 생명의 근원적 공간을 죽음에 대한 충동으로 충만한 공간으로 변주하고, 예수의 탄생을 맞이하기 위해 길을 나섰던 동방박사를 ‘세 거지들’이라는 죽음의 사도로 전환시키며, 남성 성기가 생명이 아닌 죽음의 피를 사정하게 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일반적인 상징적 체계에서 벗어나려는 라스 폰 트리에의 태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규정하려 하는(하지만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을) 남편에 대해 미칠 듯이 날뛰는 부인의 모습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안티크라이스트>는 원죄를 부여받으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간의 행위와 본성을 (원)죄로 규정해왔던 남성-크라이스트-이성에게 그 (원)죄를 되돌려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에 가깝다. 이는 <안티크라이스트>가 자신을 짓누르는 상징적 체계에 가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복수담이라는 의미이며, 또한 이 영화의 제목을 ‘ANTICHRIS♀’로 표기한 이유, 그러니까 T의 자리에 여성을 상징하는 ‘비너스의 거울’을 위치시킨 이유일 것이다. 즉 <안티크라이스트>는 남성(지식)에 의해 규정되어 왔던 여성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 (원)죄를 그의 몫으로 되돌려주려 한다. 이러한 면에서 주목할 장면은 앞서 언급한 숏의 배열이 다시 반복될 때이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남편이 부인의 목을 조를 때 다시 등장(배열의 순서는 다소 불일치한데, 그럼으로써 더욱 혼란스러운 느낌을 준다)하는데, 이때 불안의 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남편의 몸이다. 남편은 (부인에 대해) 자신이 명명했던 그 증상에 사로잡힌다. 달리 말해, 불안의 대상(숲)에 녹아들라고 했던 부인을 향한 남편의 충고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누가 (원)죄를 짊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면에서, <안티크라이스트>는 라스 폰 트리에의 소망 충족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자신의 고통과 불안의 원인을 대타자(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세계)의 몫으로 넘긴 채, 그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려는, 또는 그로부터 자신의 고통과 불안의 이유를 인정받으려 하는 자기 전시의 판타지. 달리 말해, 나는 고통받고 있는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대상은 여전히 무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에 대한 분노, 그래서 <안티크라이스트>는 그 고통의 순간을 더 강렬한 시청각적 이미지로 전시하려 한다. 오해는 말라. 나는 지금 라스 폰 트리에가 겪었던 우울증의 고통이 과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국내 개봉 버전에서는 부분적으로 거세된 장면에서) 부인은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며 자위행위를 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거세하기도 한다. 이 자위와 자학의 몸짓은 크라이스트의 세계에 대한 모욕이자 힐난이다. 이 호소는 지젝이 (프로이트의 꿈 분석을 응용하여) 이야기하는, “아버지 내 몸이 불타는 게 보이지 않으세요”라며 꿈꾸는 아버지를 힐난했던 아들을 상기시키며, 라스 폰 트리에의 호소는 바로 이 아들의 위치와 가깝다.
물론 이 아들의 위치는 상징 너머의 세계인 실재계이며, 이는 상징적 질서(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세계) 자체의 기초, 또는 그 이면을 가리킨다. 이러한 실재계는 대립항들이 일치하는 세계이다. 성행위의 절정 순간에 아이가 죽음을 맞는 영화 도입부의 장면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조르주 바타이유를 떠올렸다. 그에게 에로티즘은 자기로의 웅크림인 비연속적 폐쇄 상태를 파멸시키는 ‘작은 죽음’이자 삶의 약동이 꿈틀거리는, 달리 말해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 종교 역시 쾌락과 폭력, 환희에 기반한다는 점(잔인하기 짝이 없던 종교 의례를 생각해보라)에서, 애초에 에로티즘과 종교는 한몸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스트의 세계는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에로티즘을 ‘악마’로 규정하며, 이 둘을 분리(상징적 거세)한다. 얼핏 <안티크라이스트>는 본성과 이성이 이원론적으로 대립하는 세계를 다루는 것처럼, 달리 말해 이성을 압도하는 본성의 세계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이원론적 대립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작품에 가깝다. 이 도입 장면에서, 노골적인 섹스신(성기 노출을 포함한)으로 최대치의 미적 순간을 빚어내고, 그 위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인 <울게 하소서>를 흐르게 할 때(<리날도>는 십자군 시대를 배경으로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예찬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미(또는 성(聖))와 추의 경계가, 생명(또는 성(性))과 죽음의 경계가, 심지어는 성(聖)과 성(性)의 경계마저 흐릿해지는 순간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안티크라이스트>는 크라이스트의 상징적 세계가 ‘거세’하기 이전의 에덴을 형상화하려 한다. 이는 에덴이 남성-크라이스트-이성 외부의 자연이 아닌 그 내부의 본성이라는 것, 또는 상징적 명명 행위가 자신의 한계에 봉착하는 무능의 지점을 형상화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남편이 부인의 심리적 혼돈을 체계화, 도식화했던 피라미드 꼭대기에 ‘나’라고 쓸 때, 그것이 부인이 아닌, 말 그대로 자기 자신(남성-크라이스트의 세계)임을 깨닫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은 외부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자신의 적대자(본성-악마)를 자기 자신으로 경험하는 딜레마에 직면하고 만다. 흥미로운 것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크라이스트 세계의 폭력적 본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영화 후반부, 아내는 광기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광기의 몸짓은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여성(본성)을 악마로 규정하며 여성 학살의 구실로 삼았던 (남성의) 지식 체계를 수용한 결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에덴이라는 원초적 세계에서 스스로를 분리(또는 상징적 거세)했던 행위를 되비추는 거울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죄는 여성이 아닌 그것을 강요한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짊어져야 할 짐이다.
부인이 크라이스트의 세계가 에덴에 행한 거세를 자신의 육체 위에 새기며 스스로를 단죄할 때, 남편은 이에 눈감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방기했다는 사실 역시 그녀와 관객만이 공유하는 비밀일 뿐 남편은 알지 못한다. 마치 짊어진 십자가를 내려놓듯, 몸에 박힌 돌덩이를 벗어던진 남편은 아내를, 이미 상징적으로 죽은 부인을 다시 한번 단죄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식의 불완전성에 기반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크라이스트의 세계는 전체를 알지 못한다. 그것이 세상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오만함을 뽐내면서도, 단 한명의 여성도 구원하지 못한 이유이자, 남성-크라이스트-이성의 궁극적 한계다. 궁극적으로 <안티크라이스트>가 단죄하는 것은 여성이 아닌, 자신의 무능(본성과 원죄까지도)에 눈감고 있는 크라이스트의 세계다. <안티크라이스트>를 걸작이라 부를 만큼 창의적인지는 다소 의심스럽지만, 환상 속에서 숲에 들어섰던 부인을 여우굴(이후 남편이 자신을 스스로 매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의 시점에서 담아내던 그 시선처럼, 라스 폰 트리에는 크라이스트의 세계의 그 텅 빈 공허를 꽤 유용한 방식으로 관통한 것처럼 보인다. 확실한 것은 <도그빌>을 좋아하면서도 그 연작을 궁금해하지 않았던 내가 그의 다음 작품을 처음으로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멜랑콜리아>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