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다. 연애를 못하는 건 부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으로, “나는 예쁘다!” “내가 예쁘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면 그 자신감이 이성을 끌어들인다고 말이다. “세상에 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만 연애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부연설명에 혹했다. 그래, 가끔 어리고 예쁜 여자와 못생기고 나이 많은 남자가 사귀고 결혼도 하잖아. 통장 잔고? 그게 뭐야? 먹는 거임? 여튼 세상에 신비로운 일이 많은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 서태지와 이지아가 사실 십 몇년간 결혼한 사이였으며 현재 이혼소송 중이었다는 뉴스가 사무실을 발칵 뒤집었다. 대체 이지아는 누구일까? 혹시 서태지의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매일 “저 남자를 나에게”라는 주문이라도 외운 걸까?(전세계 울트라 초대박 베스트셀러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을 참고하시라) <씨네21> 김도훈 기자는 세계 7대 불가사의를 8대 불가사의로 늘린 뒤, 이지아의 흉상을 피라미드 옆에 놓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논점 일탈이 심각한 수준이긴 하지만 머릿속에 이지아 서태지, 서태지 이지아 외에 남은 단어가 없으므로 양해를 바란다).
<긍정의 배신>에서는 유방암 투병 생활 중에 긍정 운운하는 사회의 명령(그렇다, 언젠가부터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 훈계, 소명이 되었다)에 지쳐버린 저자가 긍정 권하는 사회에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교회가 기업을 닮아가는 가운데 기업은 오히려 교회와 유사해졌다”는 에런라이크는 긍정을 전파하는 일이 하나의 산업이 되어가고 있으며, 사회와 시스템의 잘못에 의한 빈곤을 내면화하고 그마저 긍정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들이 경제적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퍼트리고 있다고. 부정적인 사람들을 접촉 반경에서 배제하는 것은 물론 신문을 보거나 TV뉴스를 보지도 말라고 한다고. 긍정적 마음가짐이 없으면 암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암환자들은 제대로 비탄할 수조차 없어졌다고.
이른바 긍정 전도사들이 세상 모든 비판을 비판한다면, 거기에는 나도 반대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부는 이 ‘긍정 열풍’이 나쁘다고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갓 수습 딱지를 뗀 신입기자던 시절, 나를 가르친 선배는 ‘수치심’을 가르쳤다. 내가 얼마나 일을 못하는지를 자각하고, 능력있는 선배들에게 폐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일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에서 큰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감사하지만, 내가 하는 일을 내가 좋아하고 있다는 만족감은 현재의 나를 긍정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긍정’일 것이다. 긍정도 비판도 맹목적이면 비뚤어지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밤도 이상형의 남자를 내게 끌어들이는 주문을 외우며 잠자리에 들 것이다.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