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니까 생각이 난다. 꽃이 피니까 또 생각이 난다. 지난해 이맘때였다. 어느 날 친한 친구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K가 여행을 제안했다. 봄이 되었으니 남쪽으로 꽃을 맞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평소 꽃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나를 운전사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K의 강렬한 눈빛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동네 선배이자 고양시 청소년 선도위원장이기도 하며 칼 관련 소설을 쓴 적도 있는 유명 소설가 K(뭔 K가 이리도 많은가, 이하 친구 K는 K2, 선배 K는 K1, 그러면 나는 K3)의 짧고도 강력한 권유 때문이다. “꽃 보러 가자.” 네, 암요, 가야죠, 가고말고요. 운전은 당연히 내가 했다. 도착해보니, K2의 설명(“지금쯤 아마 꽃이 흐드러지게 폈을 거야”)과는 달리 꽃은 거의 없었다. 드문드문 꽃 필 조짐을 보이는 곳은 많았지만 제대로 흐드러지려면 2주는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K2는 당황한 나머지 “하하하, 오늘은 장어와 함께 술 한잔 하고, 내일 바닷가쪽으로 가서 주꾸미 축제나 구경해요, 하하하”라며 나름의 포부를 밝히고는, 포부에 걸맞게 오랫동안 술을 마신 뒤 술값도 자기가 냈(던 것 같)다.
뒤늦은 발견, 김추자와 김정미
다음날 바닷가로 가는 자동차에서 나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K1은 K2에게 봄날에 어울리는 선곡을 부탁했고, (술이 덜 깬) K2는 휴대전화로 인터넷 음원 사이트를 뒤지더니 장사익 버전의 <봄날은 간다>를 골랐다. 좋은 노래란 건 안다. 봄날에 어울리는 노래라는 것도 안다. 장사익의 노래 실력도 인정한다. 손로원 선생의 작사도 기가 막히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장사익의 목소리를 듣는 내내 괴로웠다. 여기에 딱 어울리는 문구가 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번이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아흐, 저는 운전하고 있어서 볼 수가 없어요)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저도 뭔가 씹고 싶네요) “꽃이 피면 같이 웃고” 싶었는데, 꽃이 안 피어서 두 사람은 바닷가로 향하는 길에 노래꽃을 피웠고 나만 결국 괴로워졌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주꾸미 축제는 지난주에 끝났고(어쩔 거냐!), 횟집은 썰렁하고, 횟집이 썰렁하니 두 K는 또 <봄날은 간다>를 틀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두 사람은 계속 <봄날은 간다>를 비롯한 (지금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각종 옛노래를 들었고, 나는 묵묵히 운전을 했다. 다음달, K2는 요금폭탄을 맞았고 나는 연분홍과 봄날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식은땀을 흘리는 <봄날은 간다> 증후군에 시달렸다(고 조금 과장해봅니다).
내가 옛노래들을 무작정 싫어하는 게 아니다. 한때 김추자와 김정미에 빠져(어럽쇼, 여기도 다 K일세!) 그들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살아간 적도 있다. 뒤늦게 알게 된 김추자와 김정미는 ‘발견’이었다. 김추자의 창법은 건전지에 혀를 댄 것처럼 찌릿했고, 김정미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게 폐부를 찔렀다. 봄노래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김추자의 <봄비>와 김정미의 <봄>은 봄에 가장 어울리는 배경음악이다. 김정미가 화창한 봄햇살과 어울린다면 김추자는 꽃향기 질펀한 봄밤과 어울린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김추자를 들으면서 감탄하긴 하지만) 김정미쪽을 조금 더 좋아한다. 그건 어쩌면 달변보다 눌변을 더 신뢰하는 나의 취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춤추자’라는 김추자 트리뷰트 밴드 이름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이름 한자 바꿨을 뿐인데 의미가 확, 와닿는다. 그래, 김추자를 들으면서 춤추자는 얘기겠지. 이름 참 잘 지었다. 김정미 팬으로서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김정미 트리뷰트 밴드 이름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뭐가 좋을까. (어쩐지 밴드 ‘검정치마’가 떠오르는)‘검정미 밴드’(검정이 아름다워, 검정은 때가 안 타요), 아니면 ‘진정미 밴드’(당신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 있나요?), 아니면 ‘정미소 밴드’(우리가 당신을 빻아드릴게요, 삭신이 쑤시도록). 그만하자. 김정미 팬클럽에서 항의 들어올라.
상상초월 <쇼케이스>의 첫 번째 주인공이 바로 2010 지산록페스티벌에서 ‘춤추자’로 활약했던 소울트레인이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춤추자의 무대가 대단했다고 한다. 장기하씨는 지산록페스티벌이 끝난 뒤 자신의 트위터에다 이런 글을 남겼다.
‘뒤늦은 얘기지만… 지산의 승자는 춤추자였던 듯… 정신줄 놓고 봤음….’
그리고 김추자의 트리뷰트 밴드
공연을 직접 보면 장기하씨의 말에 납득하게 된다. 아홉명이나 되는 밴드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신나고 들뜬다. 보컬은 힘차고 기타는 정교하고 브라스는 흥겹고 베이스는 리듬감 넘치고 드럼과 건반은 묵직하다. 어느 순간 그 모든 게 하나로 들린다.
김추자 트리뷰트 밴드였으니 리드 보컬 임윤정씨의 목소리를 김추자와 비교하게 되는데, 나는 목소리를 듣고 (셋 다 전혀 다른 스타일이긴 하지만) 김추자와 김정미를 동시에 떠올렸다. 김추자처럼 힘이 넘치지만 과하지는 않다. 신나는 브라스로 편곡한 <빗속을 거닐며>에서 임윤정씨의 담백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빗속을 거닐며 나는 울었다’라고 말은 하지만 최대한 신나고 흥겹게 (춤까지 추며) 노래하는 김추자 버전보다 감정이 더 잘 느껴지기도 한다. 이 정도의 김추자라면, 나도 충분히 더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임윤정씨의 목소리는 공연에서 더 빛을 발하니 꼭 한번 들어보시길.
공연 중에 (식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나에게 소울트레인은 000다’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뭔가 많이 배우게 된다는 이유로) 학교나 학원이라는 답이 나오기도 했고, (연습실 왔을 때만 밥을 제대로 챙겨 먹는다고) 식당이란 답도 나왔다. 가장 많은 답은 (두두두두둥) 가족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가족 같다(그럼 팀의 리더인 기타리스트 곽경묵씨가 아버지고 음, 임윤정씨가 어머니가 되기에는, 나이가…).
공연 전 대기실에 갔다가 아홉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면서도 기분 좋게 공연을 준비하는 걸 보고 있으면 이 사람들의 팀워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울트레인의 음악이 이렇게 신날 수 있는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멤버들은 각자 알아서 돈을 번다. 실용음악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뮤지컬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살다가 연습실에 와서 결합한 뒤 하나의 소울트레인이 된다.
리더인 곽경묵씨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흔 넘어가니 달려오던 길을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것 같다고.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곽경묵씨의 말 한마디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어렸을 때는 야간업소에서 기타 치는 선배들 보면서 별로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젠 아니에요. 기타리스트가 매일 기타를 쳐야 기타리스트죠. 그런 무대 하나하나가 절실해요.”
기차는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다들 절실하지만, 절실함을 뒤에 묻고 신나게 음악을 한다. 그런 절실한 기차 한량 한량이 결합해서 거대한 소울트레인이 되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름 하나는 잘 지은 것 같다. 낱개의 솔이 죽 이어붙어서 기차가 되어 달리는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소울트레인 타고 봄 꽃구경 가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