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영화로 만들려는 시도는 독약을 마시는 거나 다름없다. 차라리 셰익스피어라면 괜찮다. 디카프리오가 출연하는 MTV 스타일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에단 호크 주연의 <햄릿>도 우리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작가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인 덕이다. 그런데 그게 다른 작가의 고전을 각색하는 데도 똑같이 적용될까?
훌륭한 예외는 제인 오스틴이다. 오스틴의 현대화 열풍은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으로 정점에 올랐다. 브론테 자매의 팬들이라면 질투에 불타올랐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 역시 수없이 영화화됐으나 오스틴처럼 훌륭하게 현대적으로 되살아난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어쩔 도리 없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이 결혼 비용까지 꼼꼼하게 따질 만큼 현대적인 남녀상열지사를 다룬다면, 브론테 자매의 소설은 더 격정적이고 파괴적인 남녀파열지사를 다룬다. 이걸 어떻게 현대적으로 각색하냐고?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는 훌륭한 모범 답안이다.
이야기는 원작으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고아 제인 에어는 숙모 리드 부인(샐리 호킨스)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며 살아가다 결국 로우드 자선학교에 버려진다. 기독교 학교에서 엄한 매질을 견디면서 살아남은 제인 에어(미아 와시코스카)는 졸업하자마자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집사 페어팩스(주디 덴치)와 우정을 쌓아가던 그녀는 음험한 성주 로체스터(마이클 파스빈더)에게 점점 끌리기 시작한다. 물론 수많은 장벽이 있다. 하나는 약혼녀의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손필드 저택 어딘가에 존재하는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부인이다.
<제인 에어>는 1847년 출간 이후 21차례나 TV시리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제인 에어>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1944년작, 프랑코 제피렐리가 감독하고 안나 파킨, 샬롯 갱스부르가 타이틀롤을 맡은 2006년작이다. 둘 다 나쁘지는 않다. 다만, 제피렐리 영화는 거의 고딕호러에 가까운 원작의 음험한 분위기를 지나치게 누그러뜨린 탓에 원작이 지닌 에너지를 좀 갉아먹는 편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새로운 <제인 에어>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건 각색이다. 스티븐 프리어스의 <타마라 드류>(2010)에서 각본을 맡았던 신예 모이라 부피니는 ‘세인트 존 리버스’가 나오는 부분을 아예 영화의 앞과 마지막으로 옮겨버렸다. 사실 이 세인트 존 리버스라는 인물은 클라이맥스가 되어야 할 부분에서 이야기의 리듬을 늘어뜨리는 일종의 계륵이다. 스티븐슨의 44년작이 세인트 존 리버스 캐릭터를 없애버린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는 아예 제인 에어가 손필드 저택에서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목사 세인트 존 리버스(제이미 벨)에게 구출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다가 지난 일을 회상한다. <제인 에어>는 플래시백이라는 영화적인 도구를 통해 해답을 찾았다.
많은 관객은 이 영화를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과 적극적으로 비교할 것이다. <오만과 편견>이 키라 나이틀리라는 배우를 통해 낡은 주인공을 현대적인 여성으로 재창조한 것처럼 <제인 에어> 역시 미아 와시코스카의 제인 에어를 좀더 적극적인 소녀로 되살려냈다. 새로운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를 향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 당찬 소녀다. 여주인공의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재조립한 덕에 남자 캐릭터들의 성격도 꽤 달라졌다. 특히 로체스터는 주체적인 여주인공의 열망과 열정에 의해 변해가는 어떤 사랑의 상징으로서 근사한 향취를 풍긴다.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는 브론테의 원작을 훌륭하게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데 성공한 진귀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오래고 강직한 브론테 팬들이라면 조 라이트 스타일로 카메라에 흩뿌리는 역광과 사쿠라를 조금 거북스러워하며 또 다른 <제인 에어>가 만들어지길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좀더 강렬하고 음침하게, 해머 호러영화 스타일로 막나가는 <제인 에어> 말이다. 감독으로는 폴 버호벤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