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평론가, 배우 강은진·진용욱, 박정범 감독, 김도훈 기자(왼쪽부터).
영화의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 ‘탈북자 승철’이 스크린에서 툭 튀어나온 듯 무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무산일기>의 연출과 연기를 맡은 박정범 감독이다. 감독이 자신이 연출한 영화의 배우를 맡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박정범 감독의 경우 <무산일기> 속 독특한 ‘바가지 헤어스타일’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스크린과 무대의 간극이 더 좁게 느껴졌다. “감독님 헤어스타일이 이것으로 굳어진 건가. 지난해와 거의 똑같다. (웃음)” 4월8일 금요일 오후 8시 대학로CGV에서 열린 봄밤의 ‘시네마톡’은 박정범 감독의 헤어스타일에 대한 김영진 영화평론가의 농담으로 즐겁게 막을 올렸다. 시네마톡은 매달 CGV무비꼴라쥬에서 개봉하는 영화 한편을 선정해 <씨네21> 기자와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관객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대화를 나누는 행사다. <씨네21> 김도훈 기자가 진행을 맡은 가운데 <무산일기>의 배우 진용욱, 강은진씨도 자리를 함께했다.
승철(박정범)의 주민등록번호는 125로 시작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삼팔선 너머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 번호를 준다. 순하고 성실해 보이는 인상의 승철에게 이 번호는 일종의 주홍글씨다. 전단지를 붙일 때도,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125’를 본 남한 사람들의 대접은 차갑기만 하다. 오직 승철의 생활을 돌봐주는 탈북자 친구 경철(진용욱)과 강아지 백구가 그의 위안이 되어줄 뿐이다. 그렇게 팍팍한 삶을 사는 승철의 유일한 낙은 교회 성가대에서 숙영(강은진)이 노래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다. 우연히 숙영이 일하는 노래방에 취직한 승철은 다시 한번 ‘잘 살아보려’ 애쓰지만, 경철의 실수에 그가 휘말려들면서 영화는 예측 불가능한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모델인 고 전승철씨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무산일기>는 이제는 고인이 된 박정범 감독의 친구, 탈북자 전승철씨를 모델로 한 영화다. 이미 단편 <125 전승철>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친구의 이야기를 다룬 바 있는 박정범 감독은 단편을 보지 못한 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추억하며 장편을 찍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승철이가 2002년에 남한으로 넘어왔다. 그때 3, 4년간 동고동락하며 탈북자의 생활이 어떤지 알게 됐고, 친구의 삶을 바탕으로 <125 전승철>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데 재주가 없어 계속 낙방하며 실의에 빠졌다. 친구가 2006년 암투병을 시작했을 때 나는 동국대 영상대학원에 들어갔고 그 이후 친구를 많이 못 봤다. 2008년에 <125 전승철>을 찍었는데 승철이가 암 말기라서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엔딩 크레딧 화면에 등장하는 ‘이제는 고인이 된 전승철씨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라는 말은, 친구에게 보내는 박정범 감독의 뒤늦은 영상편지다.
영화 곳곳에서 고 전승철씨에 대한 박정범 감독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지만, 마냥 순둥이 같던 <무산일기> 속 승철이 엔딩을 앞두고 ‘변심’하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영화는 승철의 변심장면을 롱테이크로 비추다 한순간에 암전된다. 이 장면에 대해 박정범 감독은 “원래 의도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촬영했다. 강아지가 길바닥에 죽어 있는 모습을 보는데 승철이가 암투병하던 모습과 겹치며 눈물이 날 것 같더라. 오래 서 있으면서 승철이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그의 삶을 복기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이 영화가 가진 힘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더라. 승철이가 나에게 준 선물 같은 장면이다”라는 소감을 전했다.
탈북자 말투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진짜 탈북자 아니냐’는 의문을 샀던 배우 진용욱,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평범한 여성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 배우 강은진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다. 박정범 감독은 배우 진용욱에 대해 “진용욱씨가 오디션장으로 걸어들어오는 순간 실제 탈북자가 온 줄 알았다. 촬영 도중에 내가 많이 배웠다”는 말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은진에 대해서도 “오디션장에 숙영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말하자면 교회에 오지 않을 것 같은 지나치게 아름다운 분들이 많이 오셨는데 은진씨가 내가 생각하는 숙영과 가장 어울렸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진용욱은 “사투리보다는 인물에 집중했다”는 노하우를, 강은진은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으로서 일상생활에서도 신앙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느낄 때가 많다. 그렇기에 시놉시스를 보고 숙영이란 인물을 너무 맡고 싶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영화 속 승철이 맞는 장면은 모두 ‘진짜’
한편 <무산일기>는 액션장면이 인상적인 영화다. “누군가에게 맞는 장면이 자주 등장해 육체적으로 굉장히 아픈 영화라고 생각했다”는 김도훈 기자의 말에 박정범 감독은 2008년 부천영화제 액션스쿨에 참가한 경험을 예로 들며 액션에 대한 관심을 비쳤다. “액션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기술적인 부분을 배우고 싶어 액션스쿨에 갔는데, 거기서 <무산일기>의 권귀덕 무술감독을 만났다. 무술감독이 존재하는 이유는 액션장면을 효과적으로 보이게 하면서 배우는 아프지 않게 찍으려는 건데, 내가 진짜 때려라, 맞아보겠다고 하니 권귀덕 무술감독이 나보고 정말 이래도 되냐고 하더라.” 그러므로 <무산일 기> 속 승철이 맞는 장면은 모두 ‘진짜’다. “가짜로 보이지 않는 게 핵심”이라 생각한 박정범 감독은 맞는 장면에서의 눈빛과 신음소리가 영화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데 기여할 것이라 믿고 갈비뼈가 나가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액션장면에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감독만 열연한 것은 아니다. 승철이 끔찍이 사랑하는 강아지 백구의 연기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승철과 경철을 대하는 강아지의 태도가 다르다. 촬영하며 어떤 과정이 있었던 건가”라는 김영진 평론가의 질문에 경철 역의 배우 진용욱이 후일담을 말했다. “감독님이 어느 날 모란시장에서 개를 사왔다. 가축시장을 세 바퀴 돌아 백구를 사왔다. 나도 강아지가 귀여워 처음에는 막 만져줬는데, 감독님이 만지지 말라고 하시더라. 나는 개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역할이니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미워했다. (웃음) 감독님이 승철이처럼 밥도 직접 먹이고 산책시키니 강아지가 그런 모습에 익숙해진 듯하다.” 안타깝게도 <무산일기>에서 열연을 선보인 박정범 감독의 강아지는 지금 세상에 없다. 감독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강원도 산골마을에서 산짐승과 격투 끝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결말의 의미에 대한 질문, 관객이 승철을 어떻게 바라봤으면 하는지에 대한 질문 등이 이어졌다. 박정범 감독과 두명의 배우들이 성심성의껏 답했지만 큰 결론은 하나였다. 완전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인물들이 충돌하는 이 세계에서, 인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자 하는 것이 <무산일기>의 의도다. “타자에 대한 이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우리에게 굉장히 정직한 방식으로 말하고 싶은 바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무산일기>는 무척 흥분되고 기분좋은 영화였다.” 시네마톡을 닫는 김영진 평론가의 말처럼, 승철의 진정성이 영화를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