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간들에게 쫓기시느라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시간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이 반가워. 괜찮아, 외계인들이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런데 담배 있나? 돗대면 더 좋고.

-아이구 담배로 링도 잘 만드시네요. 대단하십니다. 암튼 폴씨처럼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이 적응하고 사는 분들이 이런 고통을 겪는 거 보면 다른 외계인들은 얼마나 더 힘들지 짐작이 갑니다. =하긴 뭐 나는 초등학교까지 마쳤으니까. 소풍 때는 내가 사회도 도맡았고 참 잘나갔어. 애들 숙제도 거의 내가 다 해줬지. 후각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우리 반뿐만 아니고 전교생 채변봉투 수거까지 내가 다 했지. 모자라면 내 걸로 좀 채워주고 말이야. 그러다 나중에 반장선거에도 나갔는데 외계인은 안된대. 내가 공부도 제일 잘하고 말도 제일 잘하는데 반장까지 시키긴 좀 그렇다 뭐 그런 논리지. 부모님이 안 계셔서 촌지 갖다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몇몇 선생들한테 미움도 많이 받았고 말이야. 그때부터 좀 삐딱해졌는지도 몰라.

-지구에 오신 지 벌써 60년이나 됐는데 감회가 어떠신가요? 정말 살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셨을 거 같은데 말이죠.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왔으니까 내가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지.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하는 것도 봤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밤낮으로 일도 해봤고, 프로야구 개막식도 경기장에서 봤어. 최근에는 촛불시위에도 나갔지. 전경들이 보고는 나를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많이 하더라고. 그때 어버이연합회 할아버지들도 내 얼굴에 가스통 들어서 뿜고 그러시던데,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가스거든. 정말 배부르게 원없이 마셨지. 암튼 생긴 게 이래서 살면서 사기도 많이 당했지. 내가 만만하게 보이나봐. 그래서 좀 독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정말 한국사람 다 되셨군요. 원래 당신네들 종족은 느릿느릿한 걸로 유명한데 고생 많으셨을 거 같아요. =그걸 말이라고 해? 그놈의 ‘빨리빨리’ 때문에 정말 고생했어. 근데 참 사람이란 게, 아니 외계인이란 게 다 적응하면서 살게 되더라고. 요즘에는 명동에서 일본 관광객이 길 물어보면 대답도 해주고 “길 가르쳐줬으면 돈 줘야 할 거 아냐!” 윽박질러서 돈도 받고 그러고 있지. 음식은 홍어를 제일 좋아해. 딱 좋아. 고향에 계신 우리 엄마가 그런 거 좋아하시거든. 갑자기 엄마 생각나네 흑.

-혹시 자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아무렴 하루에도 몇번씩 생각하지. 길거리에 다니면 너무 눈에 띄고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불편한 것도 있고 굶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근데 오히려 불쌍한 건 인간들이야. 우리는 수명이 워낙 기니까 징역 20년이라고 해봐야 그냥 1박2일 여행 다녀오는 기분이거든. 그러니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잘 생각해봐. 굳이 잡아다 넣을 궁리만 하지 말고 사이좋게 사는 길을 고민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