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추방될 때 부하린에게 남긴 말. “동지, 그대가 들고 가는 깃발에는 내 피도 배어 있소.” 스탈린과 손잡았던 부하린도 결국 숙청당한다. 처형 직전 그는 이런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코바(혁명동지였던 스탈린의 옛 별명),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하지?” 이미 스탈린은 절대권력을 쥔 뒤였다.
뜬금없이 한 세기 전 러시아의 일화들이 떠오른다. ‘쌍용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서’의 내용을 접하고서다. 응답자의 80% 이상이 중증도 이상의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이는 파업 당시(2009년 6월)나 직후(2009년 8월)의 상황보다 훨씬 악화된 것이다. 응답자 둘 중 한명은 당장 치료가 시급한 고도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년간 자살 시도를 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실제 구조 조정 시작 이후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1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했다.
이들의 목줄을 죄는 일차적인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이다. 강제해고자나 정리해고자 외에 ‘1년 무급휴직 뒤 복직’을 약속받은 이들(462명)조차 1년이 훨씬 지났지만 복직 기약이 없다. 해고자들은 쌍용차 출신이라는 낙인으로 재취업이 어렵다. 대부분 임시직, 일용직으로 떠돌고 있다. 평균 수입은 80여만원. 해고 전의 4분의 1 수준이다. 가구당 평균 3천여만원빚이 늘었고, 정부·회사·보험사 등의 손해배상·가압류 청구 금액도 235억여원에 달한다.
전체 응답자(193명)의 절반 이상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유병률도 보였다. 역시 파업 직후보다 높아진 비율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이 가중되는 탓이다. 구조조정 발표, 파업, 강제진압, 해고 및 휴직·퇴사, 빚 급증, 경제적 궁핍에 이어 가족관계도 뒤흔들렸다. 이혼, 별거 비율이 높고, 자녀와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이들이 많다. 파업 전후로 쏟아진 사회적 비난과 냉대, 고립감까지 더해져 이들은 “현재도 어느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정혜신씨는 최근 이들에 대한 집단 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3년간 30대 기업의 영업이익은 73.3% 늘었다고 한다. 감세 혜택과 고환율 정책 덕분이다. 그동안 기업은 일자리를 고작 한 자릿수(9%) 늘렸다. 기업이 돈 잘 버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런데 왜 그 길에서 쌍용차 노동자와 같은 고통과 죽음이 필요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