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민망한 고백 하나. 이 글을 쓰는 기자는 00학번으로 대학 때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신입생 시절, 꿈은 ‘당연히’(?) 영화감독이었다. 한국 감독으로는 장선우, 이명세 감독처럼, 외국 감독으로는 데이비드 핀처, 토니 스콧 감독(장 뤽 고다르도!)처럼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동기나 선배들 역시 각기 닮고 싶은 감독이 있었다. 모두가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었고, 학교 다니는 동안만큼은 현실적인 고민은 뒤로하고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청춘을 보냈다.
이번 ‘<씨네21> 설문조사’에 응한 2011학년도 영화과 신입생들은 기자가 신입생이던 때와 많이 달랐다(설문 결과표 참고). 물론 ‘영화의 꽃은 감독’이라는 말을 입증하듯 전체 응답자의 46.3%에 달하는 학생들이 졸업한 뒤 영화감독이 되기를 희망했다. 영화과 교수들의 말에 따르면, 이는 전체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과거와 비교하면 다소 감소한 수치라고 한다. 경희대학교 연극영화과 이효인 교수는 “예나 지금이나 신입생 대부분이 영화감독을 꿈꾸는 것 같다. 다만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예술, 창작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고 말했고,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이충직 교수는“5~6년 전만 하더라도 신입생의 95% 정도가 영화감독이 꿈”이었다고 전했다. 설문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지금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학생의 비중이 5~6년 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든 반면 기획·제작 프로듀서(13.3%)를 비롯해 촬영감독(10%), 편집기사(4.3%), 음악감독(3.8%), 미술감독(2.6%), 시나리오작가(2.4%) 등 감독이 아닌 현장의 다른 분야를 지망한 학생이 전체의 36.4%를 차지했다
절대적이었던 영화감독 비중 줄어
한마디로 신입생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적어도 한번쯤은 고민해 봤다는 것을 뜻한다. 막연하게 영화가 좋아서, 영화는 감독이 전부라고 믿어 영화과를 선택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큰 변화다. 이런 변화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각 학교 영화과 교수들은 “어린 나이에도 신입생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용인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이상인 교수는 “지금 신입생들이 (과거에 비해) 영리하다”면서 “영화매체에 대한 지식은 잘 몰라도 적어도 충무로가 어떤 상황인지는 잘 알고 있다”고 전했다. 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과 최두영 교수 역시 이에 동의했다. 그는 “신입생들은 영화 일을 하고 싶지만 굶어죽는 건 당연히 꺼린다”면서 “그들이 감독이 아닌 촬영, 조명, 사운드 등 기술 스탭으로 눈을 돌리는 건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큰 것 아니겠나”라고 분석했다. 신입생은 물론이고 현재 영화과 학생들 사이에 학점 관리, 토익 공부 등 학구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것도 어쩌면 영화 관련 일을 하며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이들의 최우선 과제가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 만드는 것만 생각하던, 낭만적이었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다.
지금 신입생들이 과거에 비해 좀더 현실적으로 변한 건 ‘한국 영화 산업 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유지나 교수는 “지금은 과거에 비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정보를 잡지나 방송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면서 “신입생들이 입학 전 막연하게나마 충무로의 현 상황이 어떤지 알고, 스스로 경제적인 부분에 대비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 박지홍 교수는 또 “신입생들은 디지털 매체를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체득한 세대”라면서 “기술에 접근하기가 다소 어려웠던 필름 매체와 달리 디지털은 누구나 손쉽게 이용 가능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전체를 총괄해야 하는, 복잡한 연출보다 촬영, 조명, 사운드 등 하나만 잘하면 (업계에서) 오래갈 수 있는 기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것 같다”고 설명했다. ‘연극영화과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영화와 관련된 기술(촬영·편집·조명 등)에 관한 지식과 실무능력(41.8%)’이라고 응답한 학생이 ‘영화 연출의 노하우(36.8%)’라고 응답한 학생보다 많은 것을 봐도 신입생이 기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설문 결과가 또 하나 있다. 신입생의 12.8%가 영화가 아닌 방송, 광고, 뮤직비디오 분야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를 배우기 위해 영화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학교생활한 지 한달도 채 안된 3월 말에 영화가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하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의외로 교수들은 예상했다는 반응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오명훈 교수는 “이런 분위기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조성됐다고 봐야 한다. 어쨌거나 개인적으로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본다”면서 “사실 드라마, 버라이어티 쇼, CF,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는 기본적으로 영화 언어를 응용한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든다. ‘언론고시’라고까지 불리는 시험을 치러 방송인을 뽑는 건 우리나라 뿐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최근 영화감독들이 방송 드라마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다”면서 “영화과 출신이 영화와 방송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현재 충무로 인력난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방송계 역시 질 좋은 방송 콘텐츠를 많이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을 촬영한 정정훈 촬영감독 역시 이에 동의했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정정훈 촬영감독은 “지금 신입생을 즐길거리가 영화뿐이던 과거의 영화과 신입생과 비교해서는 안된다. 어릴 때부터 <1박2일> <무한도전> 등 버라이어티 쇼와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자라온 세대라 방송에 관심을 가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면서 “아직 저학년인만큼 이 세대가 가진 자양분을 영화 만드는 과정에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학교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방송, 광고, 뮤직비디오 분야도 눈독
영화과 역시 이 점을 고민하고 있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송기형 교수는 “확실히 방송 분야로 진출하는 영화과 출신 학생들이 많아진 건 사실”이라면서 “우리 교수들이 고민하는 건 과연 커리큘럼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미 같은 캠퍼스의 신문방송학과가 방송, 광고 관련 커리큘럼을 갖추고 있지 않나. 그렇다고 영화과가 (방송 관련 커리큘럼을) 다루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라고 고민을 밝혔다. 영화과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 역시 현재 영화과가 우려하는 부분 중 하나다. 용인대학교 이상인 교수는 “정부나 사회가 영화과를 다른 일반 학과와 같은 잣대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라는 학문 자체가 일반 학과처럼 취업률로 평가할 수 없는 분야인데…”라면서 “그런 분위기에서 학생들이 (취업에) 조바심을 내는 게 당연하다. 예술 계통 학과의 역할은 학생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는 자양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한국 영화산업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영화과 신입생들이 더이상 영화만, 혹은 영화감독만 생각하던 시절은 갔다. 이런 변화된 분위기에서 학생들의 장점을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유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 현재 영화과에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기타답변
희망 직업군과 달리 롤모델은 감독에 편중
영화과 신입생에게 자신의 진로와 관련한 롤모델을 꼽아달라는 질문을 던졌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영화인 중에서는 봉준호(10.5%), 박찬욱(10%), 장진(6.2%), 이창동(4.7%), 이준익(3.6%) 등이, 외국 영화인 중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란(10.7%), 스티븐 스필버그(5%), 제임스 카메론(3.6%), 팀 버튼(3.6%) 등이 꼽혔다. 대부분이 감독인데, 이는 기술 스탭을 희망하는 신입생 역시 감독을 꼽았음을 뜻하며,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감독의 순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물론 심재명(제작), 김형구(촬영감독), 이동진(영화평론가) 등 자신이 진로로 선택한 분야의 영화인을 롤모델로 꼽은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영화감독을 꼽은 것을 감안하면 아직 이들의 업계 전체에 대한 관찰은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단국대학교 박지홍 교수는 ‘현재 신입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는 영화인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면서 “이는 앞으로 영화 공부를 하며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영화계 외에서 희망하는 직업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신입생들은 방송국PD, 광고업계, 소설가 외에도 사업가(12%), 기자(11%), 엔터테인먼트 계통(11명), 프리랜서(6명), 일반 사무직(6명) 등을 꼽았다. 사진작가(5명), 요리사(5명), 바리스타(4명) 등의 직업도 눈에 띄었다.
◆ 영화과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지식의 분야 (중복 답변 허용) · 영화와 관련된 기술(촬영, 편집, 조명 등)에 관한 지식과 실무능력: 41.8% · 영화 연출의 노하우: 36.8% · 영화 기획, 제작과 관련된 실무적인 지식: 16.6% · 영화에 대한 학문적 지식과 분석능력: 13.5% · 기타: 2.85%
◆ 영화과 졸업 뒤 희망하는 직업의 분야 (중복 답변 허용) · 영화감독: 46.3% · 기획, 제작 프로듀서: 13.3% · 방송, 광고, 뮤직비디오 등 유관업계: 12.82% · 촬영감독: 10% · 영화평론가: 6.4% · 편집기사: 4.3% · 음악감독: 3.8% · 미술감독: 2.6% · 기타: 12.2%
◆ 영화과 졸업 뒤 영화계 외에 생각하고 있는 직업 · 무응답(129명)+없다(46명): 41.6% · 방송국 PD: 15% · 광고업계: 5.9% · 소설가, 작가: 4.8% · 연극, 공연 연출: 4.5% · 기타: 20.2%
◆ 롤모델로 정한 한국 영화인 · 무응답 : 33.5% · 봉준호: 10.5% · 박찬욱: 10% · 장진: 6.2% · 이창동: 4.7% · 기타: 25.1%
◆ 롤모델로 정한 외국 영화인 · 무응답: 36.8% · 크리스토퍼 놀란: 10.7% · 스티븐 스필버그: 5% · 제임스 카메론: 3.6% · 팀 버튼: 3.6% · 기타: 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