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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괴물들 우주를 정복했구나!
김도훈 2011-04-05

<황당한 외계인 : 폴>, 영국산 코미디와 애파토우 사단이 낳은 이종 SF의 매력

사이먼 페그닉 프로스트가 돌아왔다.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고? 좀비물과 액션영화에 오마주를 바치는 코미디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의 홀쭉이와 뚱뚱이 콤비 말이다. 두 사람이 새롭게 비틀고 엎어치기 한판에 도전한 장르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SF다. 게다가 콤비는 오랜 영국인 동료 연출자 에드거 라이트 대신 주드 애파토우 사단을 끌어들였다. 결과? 끝내준다.

당신은 미국을 여행하는 외국인이다. 서부의 사막을 관통하는 고속도로에서 외계인과 조우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CIA가 따라붙는다. 이쯤 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E.T.> 이후 쏟아져나왔던 ‘외계인 조우 장르’(이런 용어는 아마 없을 테지만 없으라는 법은 없으니 그냥 이렇게 부르도록 하자). 그리고 <X파일> 이후 줄줄이 생산된 ‘외계인 음모이론 장르’(물론 이런 용어도 아마 없을 테지만 그냥 불러보자).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여보자. 만약 이 영화의 주연 및 각본가가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의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콤비라면? 맞다. 당신은 눈물을 흘리거나 두려움에 떠는 대신 웃느라 소장과 대장이 배배 꼬여 우주적 복통에 시달릴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레이엄 윌리(사이먼 페그)와 클라이브 골링스(닉 프로스트)는 영국에서 온 코믹스 작가들이다. 그들은 지난 10년 동안 저축한 돈을 모아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코믹스 콘텐츠 박람회 코미콘(이라고 쓰고 ‘전세계 오덕의 성지’라고 읽는다)에 참여한 뒤 네바다 군사시설 ‘에이리어 51’로 향한다. 그래서 그레이엄과 클라이브가 미 정부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느냐고? 그럴 리가. 두 영국산 오덕은 ‘에이리어 51’에 60년간 갇혀 살다가 자기별로 돌아가기 위해 탈출한 그레이형 에일리언을 만난다. 이름은 폴(세스 로건)이다. 이제 그레이엄과 클라이브는 대마초를 피워대고 걸쭉한 농담을 해대는 이 외계인 난봉꾼을 자신들의 RV(레저용 자동차)에 태우고는 CIA 요원들을 피해 달아나야만 한다. 게다가 도주 길에 잠시 들른 촌구석에서 기독교 원리주의자 아버지의 폭압에 허덕이며 살아가지만 역시 정신나간 기독교 원리주의자인 처자 루스(크리스튼 위그)를 만난다.

<황당한 외계인: 폴>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에 이어지는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 콤비의 장르 비틀기 연작 세 번째 영화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는 조지 로메로의 시체 3부작으로부터 <레지던트 이블>까지, 미국식 좀비 장르를 영국적 소시민 영웅담 속에서 마음껏 비틀어대는 거대한 농담이었다. <뜨거운 녀석들>은 <다이 하드>와 <리쎌 웨폰> 같은 80년대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쿠엔틴 타란티노식 재기를 더한 뒤 <위커맨> 같은 영국식 스릴러의 전통을 끼얹고 코미디로 뒤틀어낸 기막힌 오락영화였다. 다만 두 영화가 주커 사단 스타일의 단순한 패러디영화는 아니라는 걸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은 (지금은 40대 초반이 된) 30대 후반 영국 오덕들이 과거에 사랑해 마지않던 할리우드 장르에 바치는 영국식 오마주다. 에드거 라이트의 말처럼 “장르의 컨벤션과 클리셰의 축제”였다.

코미디 장르의 무규칙 이종교배

좀비 호러와 액션, 그렇다면 콤비가 다음으로 선택한 장르가 SF가 될 것임은 자명했다. 그런데 <황당한 외계인: 폴>의 시작이 ‘이번에는 SF를 비틀자!’는 천명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이 영화를 기획한 이유는 오로지 악명 높은 영국의 날씨 때문이었다. 영국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까짓 게 무슨 이유가 될 수 있느냐고 분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영국에 살아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 동네 날씨가 얼마나 끔찍하냐면 영국이 록음악계를 지배하는 이유가 ‘젊은 애들이 날씨 때문에 집 안에 틀어박혀 기타만 띵까띵까거리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는 판이다. 하여간 사이먼 페그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찍을 즈음 시시각각 비가 내리는 영국의 날씨 탓에 촬영이 지연되는 걸 저주하며 “다음 작품은 뭐냐?”고 물어보는 프로듀서에게 말했다. “사막 같은 곳. 비가 절대로 안 오는 곳에서 만드는 영화!” 그건 당연히 미국이었고, 사이먼 페그는 곧바로 “외계인과의 자동차 여행. 그게 우리의 다음 영화가 될 것이다”고 호언했다. <황당한 외계인: 폴>이 완성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사이먼 페그는 <스타트렉: 더 비기닝>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출연하면서 점점 바빠졌다. 마침내 때가 됐다고 느꼈을 무렵 에드거 라이트는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사이먼과 닉 콤비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을 함께한 에드거 라이트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사이먼 페그는 말한다. “<황당한 외계인: 폴>은 한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다 에드거가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나는 닉에게 말했다. 그럼 우린 <황당한 외계인: 폴>을 만들어볼까?” 우정에 금이 간 건 아니다. 콤비 역시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콤비의 선택은? 놀랍게도 지금 미국 코미디계를 지배하는 ‘애파토우 사단’의 그렉 모톨라 감독이었다.

자, 여기서 오랜 ‘에드거 라이트+사이먼, 닉 콤비’ 팬들은 조금 주저할지도 모르겠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에서 보여준 그들의 협업은 너무나도 단단하고 견고하다. 에드거 라이트 대신 애파토우 사단의 감독이 들어간다고? 영국인들이 영국적인 코미디 감각으로 만들어내야 온당한 영화에 미국인 감독이 들어선다고? 그렉 모톨라 역시 사실 약간 겁이 났었다고 고백한다. “에드거 라이트와 콤비의 호흡이 너무나도 잘 맞았기 때문에 시작하기도 전에 약간 겁이 났다. 그래서 에드거의 스타일을 절대 따라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백만분의 일도 못 따라갈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건대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의 도박은 썩 괜찮았다. 그렉 모톨라와 애파토우 사단(특히 ‘폴’의 목소리를 연기한 세스 로건)은 사이먼, 닉 콤비의 세 번째 장르 비틀기에 분명히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생각해보자. 그렉 모톨라 감독의 전작인 <슈퍼배드>와 <어드벤처랜드>는 딱 애파토우 사단의 정서를 담은 정수들이다. 그가 그리는 남자들은 비디오 게임과 코믹스에 환장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무능하고 숫기도 없다. 성인이 되어도 성인이 되지 않는 루저들이다. 그러나 모톨라의 영화는 루저들을 단순한 농담거리로 삼은 뒤 스크린 바깥의 세상으로 던져버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루저들을 따뜻하게 껴안고 성장시킨다. <슈퍼배드>의 루저가 단짝 루저를 자신의 삶에서 내보낸 다음 여자친구를 곁에 세우는 데 성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애파토우 사단식 성장영화의 정서를 사이먼과 닉 콤비의 영국식 코미디에 결합한 결과물이 바로 <황당한 외계인: 폴>이다.

마니아의 영화에 대중성을 수혈하다

사실 콤비의 전작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은 종종 지나치게 마니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너무 영국적이었다. 영국 코미디는 밑도 끝도 없는 소시민적 자기 비하와 자기 학대와 자기 조롱을 밑천으로 삼은 뒤 그 상태 그대로 끝내버린다. 바로 그게 영국 코미디가 진정으로 웃긴 이유이지만 영국 바깥의 보통 관객이 마음 편히 즐기기는 좀 찜찜한 데도 있을 수 있다는 소리다. 이를테면 <황당한 외계인: 폴>은 <보랏: 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식 로드무비다. 은하계의 중심이 미국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촌놈들의 문화는 소심하지만 이성적인 영국인 콤비의 시각을 통해 마치 동물 서커스 구경하듯 괴이하게 펼쳐진다. 특히 “다윈은 사기꾼”이라던 기독교 원리주의자 여주인공이 외계인 폴에 통해 우주의 진실을 깨닫고 여행에 동참하는 에피소드는 다윈의 <진화론>을 금서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가득한 미국에서는 꽤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말도 안되는 소리란 거 안다. 하지만 미국 촌동네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원래 말이 안되는 인간들이다).

그렉 모톨라는 사이먼, 닉 콤비의 풍자 정신에 애파토우 사단의 정서를 이식함으로써 영화에 절묘한 대중적 균형을 일깨워낸다. 주인공 그레이엄과 클라이브는 그저 미국을 조롱하고 풍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는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낯선 땅에서 이해할 수 없는 모험을 겪은 뒤 애파토우식 루저들처럼 멋지게 성장한다. <스타워즈>의 ‘이워크’ 복장을 한 여자를 섹시하다고 생각하던 방구석 코믹스 오덕들이 마침내 진짜 세계와 맞서면서 조금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진정한 본질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은 채로 말이다. 사이먼 페그는 말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에일리언 같다. 그게 바로 핵심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것.”

<황당한 외계인: 폴>은 어울리거나 혹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기막히게 잘 섞여 있는 장르의 잡탕이다. 이건 <갤럭시 퀘스트>(1999) 이후 가장 짜릿한 코미콘과 오덕 찬가이며, <보랏…>을 잇는 발칙한 미국 풍자 로드무비인 동시에, <새벽의 황당한 저주>와 <뜨거운 녀석들>로부터 이어지는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콤비의 장르 비틀기 완결편이다. 그걸로 끝났어도 충분했을 테지만 콤비는 미국 코미디의 대가 애파토우 사단의 피를 수혈함으로써 좀더 대중적인 영화쟁이로 성장했다. 외계인 폴의 말처럼 다윈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진화한 사이먼, 닉 콤비와 제3종 근접조우한다.

사이먼 페그와 닉 프로스트 콤비의 뜨거운 '다섯' 순간들

1. 1999년 에드거 라이트가 연출한 영국 <채널4>의 시트콤 <스페이스드>(Spaced)가 공전의 인기를 누리면서 스타덤에 오르다.

2. 2004년 콤비가 각본을 쓰고 에드거 라이트가 연출한 <새벽의 황당한 저주>가 박스오피스와 비평 양면으로 대성공을 거두다.

3. 2007년 세명이 다시 뭉친 <뜨거운 녀석들> 개봉. 사이먼과 닉, 에드거 라이트 모두 할리우드 진출의 길을 열어젖히다.

4. 2009년 사이먼 페그는 <하우투 루즈 프렌즈>에서 단독 주연, <스타트렉: 더 비기닝>(사진)에서 조연을 맡으며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굳히다.

5. 2011년 <황당한 외계인: 폴> 개봉. 콤비는 하반기 개봉할 스티븐 스필버그의 <땡땡의 모험: 유니콘호의 비밀>(사진)에서 쌍둥이 경감 톰슨 역을 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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