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 사람들이 야망이 없는 삶에 만족하고, 아침에는 11시까지 자고, 일어나서는 친구들과 어울리던 그때 말이야. 직업이든 뭐든 신경 안 쓰고, 돈이 필요하면 일주일에 몇 시간만 카페에서 일하던때 말이야. 포틀랜드는 젊은이들이 은퇴하러 가는 도시야.” _<포틀랜디아> 시즌1 에피소드1, 제이슨
스케치 1.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트레이닝복 상하의를 맞춰 입고 어그부츠를 신은, 전형적인 ‘로스앤젤레스 코스튬’의 도니(캐리 브라운스타인)가 애완견과 산책에 나서다 얼마 전 여행에서 돌아온 제이슨(프레드 아미센)과 마주친다. “정말 환상적이었어.” 진지한 제이슨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더니, 장면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메라를 향해서 다가오며 노래 부르는 합창장면으로 바뀐다. 가죽 조끼에 문신, 염색, 요란한 피어싱까지, 시대를 거스른 듯한 사람들이 모여서는 “포틀랜드에는 90년대의 꿈이 살아 있다네”를 주문처럼 반복하며, 예쁜 여자들이 안경을 쓰고, 자전거와 전차를 타는 도시, 어디든 새를 그리면 예술이 되고, 중고 레코드를 되팔 수 있는 천국이 바로 포틀랜드라고 노래한다.
스케치 2. 노스웨스트 포틀랜드, 레스토랑 ‘길트 클럽’ 피터(프레드 아미센)와 낸스(캐리 브라운스타인) 커플은 레스토랑에서 닭고기를 주문할 참이다.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 낸스는 닭고기에 대해 묻는다. “오늘 드실 닭의 이름은 ‘콜린’이에요. 여기 신상명세서가 있습니다. 콜린은 미국 토종닭이고, 방목형 목장에서 양젖, 콩, 헤이즐넛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 헤이즐넛 지역 특산인가요?” “오리건 오거닉인가요, 포틀랜드 오거닉인가요? 미국 오거닉인가요?” “방목형 목장 말이에요, 얼마나 넓죠?” “콜린에게 친구들도 있었나요? 닭날개로 팔짱도 끼고?” 이상한 호기심이 증폭한 커플은 목장에 다녀오겠다며 웨이트리스에게 테이블을 맡아달라고 부탁하고 떠난다.
스케치 3. 노스이스트 포틀랜드, 페미니스트 서점 ‘Women & Women First’. 페미니스트 서점 주인 캔디스(프레드 아미센)와 토니(캐리 브라운스타인)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한 남자(스티브 부세미)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선다. 어물쩍 서가를 둘러보는 듯하더니 남자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잠시 뒤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는 ‘손님 전용’ 화장실을 썼으니 물건을 사라고 뻗대는 두 여자와 실랑이를 벌인다. 돈을 내려고 했더니 “계산대도 아닌 곳에서 지불하려고 하는 남자는 매춘부를 사는 남자”라는 토니의 매도성 발언에 눈이 뒤집힌다. 말다툼에 지친 남자가 화장실을 한번 더 다녀오겠다고 들어간 사이 서점 주인들은 서점 문을 잠그고 나가버린다.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찾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활용하는 <포틀랜디아>는 미국 케이블 채널 <IFC>에서 얼마 전 시즌1을 종영한 TV시리즈로, 3분 내외의 짧은 스케치코미디 여러 편을 모아 30분짜리 에피소드 한편을 구성하는 형식이다. 스케치코미디란 <개그콘서트>의 ‘발레리 No’같은 코너처럼 짤막한 희극을 의미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스케치코미디 쇼로는 <NBC>에서 1975년부터 매주 토요일 밤 방영되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이하 <SNL>)가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상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풍자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또 그 때문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포틀랜디아> 역시 <SNL>에서 오랫동안 활약한 코미디언 프레드 아미센과 포틀랜드의 인디 록밴드 슬리터키니(Sleater-Kinney)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던 캐리 브라운스타인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브라운스타인은 아미센이 <SNL>에 막 출연했을 무렵 처음 만났고, 2008년 선더안트닷컴(ThunderAnt.com)에 두 사람이 함께 기획한 스케치코미디 쇼의 동영상을 공개하는 것으로 코미디 듀오 ‘ThunderAnt’의 활동을 시작했다. 선더안트닷컴의 동영상의 촬영지가 대부분 포틀랜드이다 보디 이 인터넷 코미디는 <포틀랜디아>라는 TV시리즈로 기획될 수 있었고, 초기의 몇 가지 아이디어는 <포틀랜디아>에서 활용되기도 했다.
<포틀랜디아>는 굳이 따지면 <NBC>의 인기 시트콤 <30록>의 안 닮은 형제쯤 된다. <30록>이 티나 페이가 <SNL>의 수석작가로 활동한 경험을 근거로 스케치코미디 쇼의 제작과정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그려냈다면, <포틀랜디아>는 <SNL>의 현역인 프레드 아미센이 무대에서 다뤄질 만한 스케치코미디를 무대 밖으로 옮겨낸 결과물이다. 대부분의 장면이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되는 <30록>과 다르게 100% 포틀랜드 로케이션으로 촬영되는 <포틀랜디아>는 ‘박수’ 사인에 맞춰 박수치고 환호해줄 예의 바른 관객은 만날 틈도 없이, 단 한대의 카메라와 다 합쳐도 열 사람이 되지 않는 단출한 스탭들이 만들어내는 수공예품 같은 코미디다. 무대를 떠난 대신 재촬영과 편집이 자유로워진 장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20년 넘게 <SNL>의 제작자로 활동해온 론 마이클스가 <30록>과 <포틀랜디아> 모두에 총괄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사실도 흥미롭다. <포틀랜디아>가 <SNL>의 적자라는 사실은 화려한 게스트 출연진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포틀랜디아> 시즌1에 출연한 게스트를 열거하면 스티브 부세미, 제이슨 수데이키스, 카일 맥라클란, 셀마 블레어, 가수 에이미 만과 사라 맥라클란, 영화감독 구스 반 산트 등이 있고, 실제 포틀랜드 시의 시장인 샘 애덤스가 극중에서 포틀랜드 시장을 연기하는 카일 맥라클란의 비서로 출연하기도 했다.
<슬랜트 매거진>은 <포틀랜디아>를 두고 “1990년대 미국 문화의 미묘한 특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바탕에 두고도 아주 특정한 소수를 타깃으로 만들어진 스케치코미디, 그러나 그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찾아낼 수 있는 특별한 시리즈”라고 호평했다.
닭고기의 신상명세서가 있다니…
미국 문화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 땅은 넓고, 1990년대를 한국에서 보낸, 결국은 유학생인 내게 <포틀랜디아>는 낯설게 다가왔다. 심지어 처음에는 언제 어디서 웃어야 할지 타이밍을 찾지 못해서 30분이 채 되지 않는 에피소드 한편을 보면서 90분짜리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메리칸 퍼니스트 홈비디오>의 웃음 코드를 모르고 볼 때, 나는 웃기지 않은데 효과음으로 삽입된 웃음소리들이 너무 커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포틀랜디아>를 보면서 떠올랐던 가장 큰 감정은 의심이었다. 수년간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TV드라마 속 설정을 쉽게 믿는 것이 이야기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지름길임을 배웠다. 우주선이 하늘에 나타나도 의심하지 않았고, 좀비들이 도시를 초토화해도 수긍했다. 한데 <포틀랜디아>는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 90년대의 꿈(?)이 살아 있다지만, 지금은 2011년이 아닌가, 아무리 유기농에 유난을 떠는 미국이라지만, 닭고기의 신상명세서를 가지고 있다니 말도 안돼, 하지만 T V속 이야기라고 덮어놓고 허구로 치부하기에는 <포틀랜디아>의 설정에는 뭔가 너무 진짜 같은 예리함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믿기는 어려운데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불편함.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혹이 솟았다. 포틀랜드가 정말 저런 곳일까? 궁금해져서 가보고 싶어졌다. TV를 보다가 이러기도 처음이다.
포틀랜드는 이상한 곳이 틀림없다는 의혹에 힘을 실어준 몇 가지 진실 혹은 루머들. 1. 시장 샘 애덤스는 <포틀랜디아>가 첫 방영된 1월21일을 ‘포틀랜디아 데이’로 정했다. 2. 스케치2의 ‘길트 클럽’은 재료로 사용하는 육류의 신상명세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100마일 이내에 위치한 지역 특산품으로만 요리를 만들어 판매하며,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디너 메뉴의 재료였던 새끼 돼지의 두개골이 식당 안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