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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희섭,정영헌,최정열] ‘헝그리 정신’은 계속된다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11-03-30

20주년 맞은 독립영화워크숍의 낭희섭 선생과 정영헌, 최정열 수료자

왼쪽부터 낭희섭, 정영헌, 최정열씨.

1991년 3월23일. ‘독립영화워크숍에 관한 보고 시사회’가 시작됐다. 외국 유학만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굳건하게 믿었던 시절. 독립영화워크숍은 영화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문턱을 없애고 그 길을 제시해준 교육기관이다. 최첨단 장비와 시설로 무장한 영화 교육기관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지만, 이곳은 초창기 그대로 아날로그적인 원리, 원칙을 꼿꼿하게 고수해왔다. 배출된 기수만 벌써 134기. 1기 류승완 감독을 비롯해 지난 20년간 1천여명의 현장 영화인이 이곳에서 영화의 기본을 연마했다. 워크숍을 꾸준히 개최해온 신당동 독립영화협의회(http://inde1990.cyworld.com)를 찾았다. 1968년에 지었다는 낡고 오래된 건물이 워크숍의 본거지. 워크숍의 전체 교육을 책임져온 낭희섭 선생님, 워크숍 과정을 수료하고 장편을 준비 중인 정영헌(32기 수료), 최정열(37기 수료)씨를 만나, 그간의 발자취를 짚어보았다.

-20주년 행사 준비로 요즘 한창 바쁠 텐데. 낭희섭_ 올해가 20주년인 건 알았는데…. 준비할 사람도 다 도망가고, 먹고살기 바쁘니까 제대로 준비가 됐나 싶다. 처음엔 조촐하게 기념하자고 했는데 생각보다는 좀 모양새가 갖춰졌다. 과시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함께한 이들에게 의미있는 해라는 생각에서 추진했다.

-독립영화워크숍에서 고수해온 원칙이 있다면. 낭희섭_ 철저하게 공동 작업이 원칙이다. 기자재나 공간 자체는 낙후하지만 영화에 처음 입문하는 친구들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모두 영화를 꿈꾸면서 참여한 친구들인데, 한명만 연출자가 되고 나머지는 다 스탭 역할을 하는 경쟁적인 구도는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연출부, 촬영부 이렇게 파트를 나눠서 서로 번갈아가며 역할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지금껏 이어왔다. 이 방식이 영화교육의 대안을 제시할 만큼 시스템화되지 못했다는 건 반성할 점이다. 그럴 만한 힘이 사실 부족했다.

-워크숍 수료 이후 지금은 각자 작업을 하고 있는데, 처음 독립영화워크숍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정영헌_ 2001년에 과정을 수료했다. 영화를 하자 싶었는데 영화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를 때였다. 우연히 워크숍을 알게 되고 참여하게 됐는데 재밌더라. 여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거 없었다. 환경은 열악하지만 원시적으로 영화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이곳이다. 최정열_ 벌써 10년 전이다. 등록하기 전에 설명회 같은 걸 먼저 하는데, 깜짝 놀랐다. 당시 한겨레문화센터도 있었는데 에어컨도 있고 시설이 꽤 좋았다. 그런데 여긴 건물 보면 알겠지만 시설도 낙후되어 있고, 화장실 냄새도 아주 심하고. (웃음) 고민이 되더라. 이런 데서 어떻게 공부를 하지? 보이는 것만으론 아마 아무도 선택하지 않을 거다. 낭희섭_ 여기가 제일 수업료가 싸서 왔다는 학생들이 많았다. (웃음)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정규 영화과에서 1년 동안 수료할 내용을 6개월이면 마스터할 수 있다. 완성된 작품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과정 자체를 평가하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작업보고서 등도 꾸준히 검토하는데 그게 자신을 객관화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워크숍에선 어떤 교육을 받게 되나. 정영헌_ 들어올 땐 뭔가 대단한 걸 해보겠다 싶지만, 막상 할 수 있는 건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이 모여서 뭔가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오산이다. 내가 다니던 때는 류승완 감독이 모든 학생들의 좌표였다. 여기서 열심히 하면 나도 류승완처럼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거다. 알다시피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만큼 좌절감도 느끼게 된다. 최정열_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주 그런 현실을 일깨워준다. (웃음) 여기 오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생업이 따로 있는 사람도 있고, 다른 사정도 있으니 탈락자가 많이 생긴다. 그럼, 선생님이 오히려 “저게 옳은 길이다. 너희도 잘 생각해라” 하신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위대한 탄생>의 방시혁 같은 멘토인 거다. 낭희섭_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할 만한 사람만 남으라는 의미였다. 공동작업을 해보면 어떤 사람은 40%, 어떤 사람은 10%의 능력이 있는데 다 끝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는 거다. 그런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도 이곳의 중요한 역할이다.

-막상 교육과정에 참여해보니 어떻던가. 낭희섭 선생님의 방침이 효과적이던가. 최정열_ 헝그리 정신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워낙 앞뒤 기수들간의 소통이 원활하다 보니 선배 기수 누가 영화 찍는다고 하면 가서 스탭으로 참여하고, 또 내 영화 찍을 때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고 그런 품앗이가 가능하다. 처음 배운 게 없는 거 있게 하고, 안되는 거 되게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원론적이고 원칙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습득된 것 같다. 다닐 땐 우리끼리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을까, 왜 원칙만 고수할까 하루에도 수십번씩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결국 충무로 현장에 가서도 이런 헝그리 정신이 도움이 되더라. 척박한 한국영화 현실에 딱 맞는 교육이었다. 정영헌_ 당시만 해도 디지털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는데 선생님이 그걸 못하게 하셨다. 인력도 적었고, 작업은 힘들고 작품 완성도도 떨어졌다. 말도 안된다 싶었다. 그런데 과정을 수료하고 상업영화 현장 작업, 개인 작업을 하면서 깨달음이 오더라. 기본적인 연마, 수련이 결국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됐다. 최정열_ 선생님이 자신을 ‘자원활동가’ 혹은 ‘조교’라고 지칭하신다. 낭희섭_ 1985년부터 했는데 그때도 조교고 지금도 조교다. 권위는 안된다. 엄연히 이건 교육서비스이니 인간적인 예의를 지켜야 한다. 할 수 있는 건 학생들에게 맡기고, 스스로 그걸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등 떠밀어서 한 일이 아니지 않나.

-디지털 시스템의 도입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쉽고 간편한 경로가 열린 시대다. 독립영화워크숍이 시대에 뒤처진다는 우려도 들겠다. 낭희섭_ 내 능력이 안되니 이런 방식을 고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영화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작업은 영화 입문자들에겐 더없이 중요한 경험이다. 디지털 작업은 거의 혼자서도 가능한 작업이니 접근 자체가 다르다고 본다. 정영헌_ 요즘 충무로 현장이 거의 디지털화되어 있다. 필름으로 작업할 때의 긴장감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찍다 보면 되겠지 하는 생각도 없잖아 팽배하다. 스탭들만 그런 게 아니다. 심지어 배우가 직접 ‘컷!’을 외치기도 한다. 워크숍에서 16mm로 작업할 때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하고 준비하면서 결국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배웠단 생각이 든다. 최정열_ 10년 전에도 가장 싸게 필름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는데, 이젠 필름 작업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

-제도적인 보완 혹은 절실한 요구사항 같은 게 있다면. 정영헌_ 워크숍이 좀더 알려지면 좋을 것 같다. 이건 선생님의 경영방침에는 반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한데, 워낙 홍보하는 데 인색하신 분이다. 마음을 좀 바꾸셔서 변화를 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열악하다뿐이지 장비는 다 있는데, 이걸 바꾼다고 좋은 작품이나 인재가 나오지는 않겠지만. 낭희섭_ 없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작품을 리스트업했을 때 여기서 나온 작품이나 4년제 정규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시설이나 장비는 열악하지만 강사들은 자신한다. 시스템을 바꾸자면 그것 자체가 다 투자비다. 학생들한테 그 부담을 전가할 수는 없다. 최소한 기본적인 것만 하고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아야 한다.

-20년을 이끌어왔다. 지난 20년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또 앞으로 20년에 대한 계획은 무엇인가. 낭희섭_시작할 때가 문화운동으로 영화의 필요성이 절실하던 때였다. 개인적으로 자격을 따지기 이전에 수습하러 왔다가 눌러앉은 케이스다. 그러면서 공동작업의 의미를 알게 되고 후배들한테 많은 걸 이식하며 지금까지 왔다. 시대적으로 이젠 초창기와 영화의 필요성이 달라졌지만, 이곳의 지향점은 결국 교육이다. 현역에 가서 돈 버는 영화를 하더라도 졸업생들과 계속 교류하고 연계되면 좋을 것 같다. 정영헌_ 내겐 이곳이 추억과 같은 곳이다. 영화를 처음으로 시작한 곳이고, 지금도 영화를 힘겹게 하고 있다. 그런 순간마다 돌아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여기다.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악전고투하고 있지만, 서로 다독여줄 수 있다. 옛날에 이 공간이 발전했으면 했지만, 지금은 변하지 않고 오래 남아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을 보니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긴 하다. 최정열_ 이 시스템이 잘 유지되어 영화인이 많이 배출됐으면 좋겠다. 독립영화협의회가 발전해야 한다면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토대는 우리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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