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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기자클럽] 쇼브라더스 전성기의 한 챕터

올해 홍콩영화제가 회고전 마련한 구이즈훙 감독의 작품세계

<양기>, <티 하우스>

1970년대 초엽 내가 처음으로 동아시아영화를 보기 시작할 무렵은 홍콩의 쇼브러더스가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로, 거대한 공장 시스템을 통해 한해 35편 정도의 영화를 찍어댔다. 당시 그 지역 한해 영화 제작 편수의 40%에 이르는 분량이었다. 매주 새로 나온 쇼브러더스 영화를 보는 건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막을 내리고 유럽의 작가 시스템이 시작될 시기에 자라난 나는, 이름없이 찍혀져 나오는 쇼브러더스 영화를 보며 과연 어느 감독의 작품인지 가늠해내려 애쓰곤 했다. 쇼브러더스 밖에서 경력을 시작한 추위안이나 리한샹 같은 감독의 작품을 골라내는 것은 쉬웠지만, 쇼브러더스의 계약 감독이었던 구이즈훙, 쑨중, 허멍화 등의 ‘개인적 스타일’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중 한명인 구이즈훙 감독 회고전이 이번 홍콩영화제에서 작은 규모로 열리고 있다. 그의 스타일은 보통, 시각적으로 ‘사실주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현대 액션영화로 기억된다. 그러나 사실 이런 영화는 그가 만든 40여편의 영화 중 극소수이며 그가 쇼브러더스의 제작 시스템에서 여러 작품을 작업하며 긴 세월을 지낸 뒤에야 만들어졌다.

당시 다른 쇼브러더스 직원들처럼 구이 감독 역시 홍콩 출신이 아니다. 1937년 12월20일 중국의 광저우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 중일전쟁을 겪었다. 이후 가족과 함께 홍콩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대 중반 타이베이의 국립 타이완예술대학에서 연극연출을 공부했다. 졸업하고 나서 그는 타이완에서 애니메이션 조감독으로 일하고 영화 몇편을 감독하기도 했다.

쇼브러더스의 초대로 1964년 홍콩으로 돌아온 그는 6년간 판레이, 허멍화 같은 감독들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그러나 1965년 훈련차 일본의 쇼치쿠 스튜디오로 갔던 그는, 이후 뮤지컬처럼 당시 유행하던 장르의 기술적 면을 강화하기 위해 쇼브러더스가 초대한 일본 감독들과 함께 일했다.

1970년대 초반 구이즈훙은 감독으로 승격됐다. 홍콩이 한참 서구로 뻗어나가며 쇼브러더스 역시 국제적인 합작으로 야한 영화의 제작에 손을 뻗치던 때인 1973년에서 74년 사이, 구이 감독은 일본 포로수용소의 여간호사를 다룬 <여감방>(1973), 독일과 합작 프로젝트로 에른스트 호프바우어 감독과 함께 작업한 <양기>(1974)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다. <양기>는 “공자 이르길, 여자들은 버찌를 잃고 남자들은 머리를 잃는다 해요” 같은 느끼한 대사들이 가득하지만, 이 영화는 구이 감독의 장르영화를 만드는 재능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구이 감독은 말년에 이르러 <헥스> 시리즈를 만들며 공포영화의 본령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천관타이가 출연한 <티 하우스>(1974)는 구이 감독을 사실적이면서 시각적으로 혁신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현대 액션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대중에게 인식시킨다. 당시 그가 만든 최고의 영화 중 상당수는 베테랑 쓰투안이 쓴 영화들로, 그가 이미 4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쇼브러더스조차 구이 감독을 ‘사실주의적 스타일의 젊은 감독’으로 광고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나날에 이르러 비로소 그는 배우 천관타이와 생애 최고작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 영화는 누아르풍의 시대무협극 <만인참>(1980)으로, 전통적인 쇼브러더스 제작 라인 안에서 발전된, 시각적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폭력과 평화주의 사이의 갈등을 담고 있다. 4년 뒤 미국으로 건너간 구이 감독은 1999년 10월1일 간암으로 61년에 걸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아들 밍 ‘비버’ 구이는 현재 미국과 중국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번역=이서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