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안돼요, 안돼. 월레스, 오늘은 그 따위로 하지 말아요. 당장 저 mother fucking, bloody bastard, pain-in-the-ass, dick cheese stinking, dirty, shitty, wanking, fucking-bloody, fucking bastard, fucking stupid, cunt of a fucking할 게이트나 열라고요!!!!<Episodes> 시즌1 에피소드2, 베벌리 링컨, 할리우드에 사는 유명인사들의 사생활을 배려한답시고 매번 자기를 무시하는 고급주택단지 경비원 월레스에게 분노의 영국식 욕설 폭탄 콤보를 터뜨리며.
삶은 사는 걸까, 아니면 흘러가는 걸까. 10년 전의 나라면 패기 넘치게도 전자를 응원하다 못해 주장했겠지만, 요즘은 후자의 뒤에 조용히 줄 서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사는 건지, 휩쓸려가는 건지 모르게 넋 놓고 있으면 하루는 훌쩍, 일주일도 그냥, 한달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시간을 도둑맞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던 차에, 오늘 정신이 번쩍 드는 사건이 터졌다. 넋 놓고 산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금전적 손실은 물론 자책감과 피로까지 밀려왔다. 그리고 충격은 고스란히 마음으로 전해졌는데, 덕분에 멍하게 부유하던 정신줄이 손아귀로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매일 닥친 일을 치우며 살다가 타성에 물들어 갈 때쯤, 어디선가 계시처럼 사건이 터지곤 했다. 더이상 달려가면 안되니 잠시 멈춰서라는 것처럼.
영국식 유머와 미국식 유머의 결합
미국 드라마의 전성기를 10년이나 누린 <프렌즈>의 창조자 데이비드 크레인이 오랜만에 내놓은 코미디 시리즈 <에피소드>도 이를테면 저런 계시성 짙은 사고로 시작한다. 파일럿 에피소드는 이렇다. 영국의 성공한 TV작가 부부 베벌리 링컨(탐진 그레이그)과 숀 링컨(스티븐 망간)은 리메이크를 방영하고 싶다는 미국 방송국 사장 머크 래피더스(존 판코우)의 제안을 받고 LA에 왔다. 베벌리는 숀과 크게 다투고는 집을 나서는데,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돼 헛갈린 탓에 역방향으로 운전하다 마주 오는 차와 충돌한다. 거기서 시간은 7주 전 런던으로 돌아간다. 링컨 부부가 함께 만든 TV시리즈 <라이먼의 아이들>이 2년 연속 영국아카데미시상식(BAFTA)에서 상을 받은 날이다. 마침 BAFTA 파티에 참석한 머크는 “당신들의 쇼를 너무 좋아해서 그 쇼와 섹스라도 하고 싶다”는 사탕발림을 하며 미국판 드라마 제작을 제안한다. 미국에서 지낼 수영장 딸린 저택은 물론, 자동차도 제공한다는 파격적인 대우도 솔깃했지만 할리우드에서 성공하면 금의환향해 부와 명예를 거머쥐리라는 계산이 컸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달콤한 제안이 ‘할리우드 액션’이었음은, 캘리포니아의 햇살에 링컨 부부의 피부가 채 그을리기도 전에 드러난다. 할리우드 드림이라니 아마 아메리칸 드림보다도 허황되며 캘리포니아 드림보다도 비현실적일 것이다! 방송국 직원(이면서 머크의 정부인) 캐롤(캐서린 로즈 퍼킨스)은 매분 매초 이곳이 할리우드임을 확인해준다. 부부 앞에서는 “오, 마이. 갓. 아이. 러브. 잇. 환상적이에요”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그게 말이죠, 머크가 <라이먼의 아이들>을 사실은 보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머크가 쇼에 대해서 확신이 없어요”, “머크를 거치지 않으면 캐스팅할 수 없어요”라며 정색하고 딴소리를 한다. 그것도 부족해 방송국에서는 영국판 오리지널에서 기숙학교 교장 라이먼을 연기했던 로열아카데미 출신의 대배우에게 오디션을 보라고 하더니 퇴짜를 놓는다. 그러고는 골라왔다는 배우가 <프렌즈> <조이>의 ‘참을 수 없이 존재가 가벼운’ 매트 르블랑(매트 르블랑)이다. 그렇게 “재담가이며 박식한 기숙학교 교장이 레즈비언 사서를 짝사랑하는 <라이먼의 아이들>”은 “하키 코치가 섹시한 금발의 사서에게 지분거리는 <Pucks!>”로 둔갑해버린다. 그리고 <라이먼의 아이들>이 초토화됨에 따라 우정과 사랑으로 가꿔온 링컨 부부의 결혼생활도 내리막길을 만난다.
지난 2월20일 7번째 에피소드로 시즌1을 마무리한 <에피소드>는 2011년 1월9일 미국 유료케이블채널 <쇼타임>에서 첫 방영한 뒤, 바로 다음날인 1월10일 영국 채널 <BBC>에서도 방영하는 동시상영 방식을 선택했다. 흡연장면은 물론, 섹스, 섹스비디오, F-워드, C-워드까지 대놓고 등장하는, 미국TV에서 보기 힘든 대담함은 아마 영국과의 합작이어서 가능한 부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다른 기준으로 사고하는 영국인과 미국인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양국에서 코미디의 소재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냉소적이고 영리한 언어유희로 대표되는 영국식 유머와 내가 아니면 남을 바보로 만드는 제로섬 게임식의 헐뜯기, 토사물과 방귀는 기본이요, 1초에 몇번씩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슬랩스틱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미국식 유머는, 완전히 다름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공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에피소드>는 지루하게 이런 차이를 비교하고 대조하고 판단하는 대신, 그냥 이용한다. 베벌리와 숀은 비음이 잔뜩 섞인 영국식 영어로 조잘조잘 떠들고, 매트 르블랑은 느물느물한 말투와 꿈틀거리는 눈썹으로 ‘조이 트리비아니’와 ‘매트 르블랑’ 사이를 오간다. 그러면서도 할리우드가 보이는 것처럼 얄팍하고 상업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말장난과 슬랩스틱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웃음이 <에피소드>가 선사하는 코미디의 거죽이라면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짜 재미는 매트 르블랑-베벌리-숀의 이상한 삼각관계가 더 이상한 먹이사슬로 변하면서부터 드러난다. 링컨 부부를 연기하는 두 영국 배우의 연기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훌륭하지만, 역시 <에피소드>의 주역은 매트 르블랑이다. 매트 르블랑은 더이상 ‘조이 트리비아니’의 이미지를 벗겨먹지 않는다. 음식과 여색에 환장하는 건 오히려 방송국 사장인 머크다. <에피소드>의 매트는, <조이>의 실패를 지울 만큼 진지한 컴백을 꿈꾸는 중견배우인 동시에,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어화둥둥 살아온 허영 덩어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교묘하게 링컨 부부를 조종한다. 둘 중 유약하고 여린 숀에게는 “세계에서 3대밖에 없는” 스포츠카와 “쥘 베른 소설에 나오는 바다 괴물만큼 거대한” 바지 속 물건을 자랑하며 남자친구들의 유대를 쌓고, 언제나 올곧은 베벌리에게는 미취학 아동들이 애정을 표시하듯 속을 뒤집어놓는다. 먼저 열 받고 화내고 실수하는 쪽이 언제나 베벌리다보니 승자는 100% 매트인 셈. 라이먼이라는 캐릭터를 교장에서 하키 코치로, 상대역인 사서의 성적 취향을 레즈비언에서 이성애자로 바꾸는 결정에서도 칼자루를 쥔 사람은 매트였다. <USA투데이>는 <에피소드>의 매트 르블랑을 두고 “자기 반영적이며 자조적인 캐릭터가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 만큼 똑똑하고, 그걸 무기로 휘두룰 수 있을 만큼 재능이 있다”고 호평했다.
매트 르블랑의 등장이라니
처음에 <에피소드>를 눈여겨본 이유는 <30록> <스튜디오 60> <앙투라지> 등의 TV시리즈가 견지해온 쇼비즈니스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과 다르게, 포장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스테레오타입을 드러내는 유치함과 솔직함 때문이었다. TV를 이야기하는 TV시리즈인데다가 자기 반영적인 캐릭터까지 등장하지만, 자의식이나 허영은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할 뿐 과도하지 않았다.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그리고, 오늘의 ‘사고’는 <에피소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조금 더 넓혔다. 링컨 부부는 꿈을 좇아 할리우드에 왔지만, 자식 같은 작품 <라이먼의 아이들>이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거쳐 <Pucks!>가 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만 본다. 누구도 의도하거나 희망하지 않았지만 일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하루 종일 함께 일하다 보니 과중한 스트레스 상황은 관계에 독이 됐다. 바로 그 시점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베벌리와 숀이 서로를 오해하고 등지려는 순간, 사고는 일어난다. 더이상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가기 전에 이 사고를 핑계 삼아 조금 쉬라는 계시처럼 말이다.
한데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인지, 하필이면 그 차 사고의 상대는 매트 르블랑이었다. 그리고 계시의 문제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인간으로 하여금 추측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스포일러 주의!!) 차 사고를 휴식의 계시가 아닌 다른 계시로 받아들인 베벌리와 매트는 조금은 다른 차원의 사고(?)를 친다. 그리고 개코를 가진 숀은 냄새만으로 그 사실을 알아내고, 설상가상인지 금상첨화인지 방송국은 <Pucks!>를 정규편성하기로 결정한다. 결론은 세 사람이 할리우드에서 볼일이 좀더 남았다는 것. 아직까지 시즌2 방송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기묘한 스리섬이 어떻게 흘러갈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