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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가는 영화’를 마음으로부터 길어올리다
주성철 사진 오계옥 최성열 2011-03-24

임권택 감독에게 101번째 작품이자 첫 디지털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에 대한 얘기를 듣다

다시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달빛 길어올리기>에 대해 질문해야 할 것들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천년학>(2007) 이후 ‘101번째 영화’라는 깊은 울림에 답하는 <달빛 길어올리기>는 그 스스로 ‘신인감독의 심정으로 만든 영화’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100이라는 숫자를 채우고 난 다음 박중훈이라는 배우와 드디어 조우했고, 무엇보다 거장의 첫 번째 디지털영화라는 점에서도 질문하고 싶은 것들은 많다. 게다가 수많은 화려한 카메오들의 면면을 보자면 그 101번째라는 기념비를 축복하는 우정의 영화 같은 느낌도 든다. 영화 속 한지와도 같은 임권택 감독과의 만남은 지난 화요일(3월8일) 늦은 저녁 자택에서 이뤄졌다. 이미 시사회를 끝낸 다음날, 새로운 시도를 담아낸 자신의 새 작품에 쏟아진 호의적인 평가들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씨네21>을 향해서도 “너무 밀어주기식으로 그러면 안되는 거 아뇨”라고 웃으며 그는 조용히 찻잔을 들고 정성껏 답을 해주었다. 한지와 영화, 필름과 디지털, 다큐와 영화, 그 경계를 오가며 그는 낮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영화를 얘기했다. 상투적인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는 정말로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영화청년이었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통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전체를 되새김하게 만든다. 감독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자연스레 여러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가령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은 해외 영화제에서 만난 다른 나라 감독들의 얘기를 끄집어낸다. “중국에는 전통의 선지가 있고 일본에도 화지가 있는데, 한국에는 도대체 뭐가 있느냐”고. 그것은 해외 영화제에 나간 수많은 한국 영화인들이 늘 받는 질문이기도 했다. 과연 한국에도 중국이나 일본처럼 어떤 기억할 만한 영화적 개성과 전통이 있느냐는 호기심이었다. 바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한지처럼 그런 서방세계의 낯선 호기심에 홀로 버티어선 이름이었다.

더불어 영화에서 화선지와 한지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은 바로 임권택 감독의 작가적 야심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먹을 깊고 선명하게 흡수해 필력 없는 사람도 마치 필력 있는 것처럼 꾸며주는 화선지와 달리 필력 없는 사람은 결코 제 맘대로 다룰 수 없는 까다로운 종이가 한지다. 하지만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을 때 그 글씨와 종이는 천년에 이른다. ‘천년 가는 종이’에 대한 애착은 바로 늘 ‘천년 가는 영화’를 마음에 되새기며 현장을 지휘해온 임권택 감독의 고집스런 지난 시간일 것이다. 그저 적당한 수준에 만족하고 멈춰서도 뚝딱 한편의 영화가 되도록 눈속임을 주는 화선지 같은 감독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극도로 고양된 수준의 기술과 노력이 담겨야 비로소 최고의 영화를 낳는 한지 같은 감독. 그렇게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의 우수성에 대한 절묘하고 성숙한 다큐-극영화이자 임권택 감독 본인의 견고하고 섬세한 예술관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다.

영화 속 7급 공무원 필용(박중훈)은 늘 아련한 달빛을 받으며 퇴근한다. 자동차는 저 멀리 세워두고 차가 닿지 않는 대문까지 한참을 걸어들어간다. 더해지는 이야기나 특별한 효과 없이 굉장히 단순하지만 <달빛 길어올리기>가 보여주는 ‘시정’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그것은 여전히 영화를 고민하고 그를 향해 조심스레 걸어들어가는 청년 임권택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의 101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디지털영화로 완성된 <달빛 길어올리기>는 이전 영화들과의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시도들로 빛나는 영화다. 이처럼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라는 표현과 더없이 멋지게 조응하는 영화다.

-영화 제작을 구체적으로 제안받기 이전, 한지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셨습니까.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것이기도 해요. 우리 어렸을 때만 해도 1년에 한번씩은 문짝을 싹 뜯어서 창호지 교체를 했어요.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게 참 신기했죠. 안팎의 공기가 순환하면서 문 위로는 방안 먼지가 쌓이고 바깥 먼지는 아래쪽으로 쌓이는데, 그런 식으로 공기가 정화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면서 다들 한지에 대한 저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었을 거요. 그리고 철이 되면 미적으로 국화꽃이나 과꽃을 수놓기도 했는데 그게 또 참 아름답죠. 그렇게 한지는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취화선>과 <천년학> 등에서 CG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취화선>에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장승업의 모습이라든지 <천년학>에서 바닷물이 드나드는 선학동에서 날아오르는 학의 모습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이제는 CG기술로 구현 가능하기에 촬영을 결정했다’고까지 하셨을 정도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어떻습니까. =영화 속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CG기술을 유용하게 썼지요. 한지 내의 결이 어떻게 엉켜들어가는지 세밀하게 표현하는 부분에 신경을 썼고요. 그외 부분에서는 우리가 겨울을 놓쳐버려서 근처에다가 눈을 뿌려놓고 그 위로는 다 CG로 한 장면들이 있고,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필용(박중훈)과 지원(강수연)이 밤에 라이트를 끈 채 자동차를 타고 김제평야를 지나가며 달빛을 바라보는 장면이죠. 낮에 찍어서 달밤으로 만든 거예요. (웃음)

-각색을 맡은 송길한 작가의 고향이 전주이고 그의 외조부 또한 이른바 ‘악필’(握筆)법의 서예 대가인 석전 황욱 선생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감회가 더 새로웠을 거요. 그뿐만 아니고 송하진 전주시장의 아버지인 강암 송성용 선생도 명필이었죠. 두분은 전북지방의 서예를 대표하는 대가들이었어요. 송하진 시장 역시 시와 서예에 능한 분이라 이번 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요.

-그래서 궁금한 건 <취화선>이 화가 장승업의 얘기였던 것처럼 <달빛 길어올리기> 역시 서예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한지 만드는 장인을 주인공으로 할 수도 있고요. 마찬가지로 <서편제>나 <천년학>도 그러하듯 감독님께서는 늘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달빛 길어올리기>는 어찌 보면 그에 대한 관찰자라 할 수 있는 평범한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으셨습니다. =한지를 중심에 놓고 여러 고민을 했어요. 한지를 만드는 사람의 우여곡절로 영화를 풀 것인가, 아니면 장사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갈 것인가 말이죠. 그런데 그러다보면 한지 얘기를 하기 위해 시작한 영화에서 다른 사건들이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어요. 한지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있고, 우리에게 왜 한지가 필요하고 중요한가 하는 얘기가 중심인데 이도저도 다 놓칠 수 있는 거요. 그래서 평범한 일상을 사는 7급 공무원 필용이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통해 한지와 만나는 이야기로 가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강수연이 내게 “감독님 이거 다큐예요?” 묻기도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님의 이전 영화들과 다르게 극적 사건들이 상당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과의 로맨스나 한지 제조업자들과의 마찰도 있지만 전면에 부각되는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은 감독님께 굉장히 중요한 영화적 결단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렇게 답답하게 종이 만드는 사람들 사이를 필용이 설득시키기 위해 협박하고 화도 내고 하면서 돌아다니죠. 그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소재가 아닌 건 분명해요. 하지만 이런 공무원의 별 재미도 없어 보이는 일상을 쭉 따라가도, 한지 자체가 지닌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드라마틱한 걸 배제하더라도 힘있고 재미있게 나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어 그렇게 해본 거죠.

-그런 재미로 보자면 한지에 관한 영화는 이전에 없었다고 해도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영화 만들기 전에 이미 보셨을 것 같은데 <달빛 길어올리기>가 그 다큐멘터리보다 재미는 물론 좀더 새로운 정보를 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전주 MBC에서 제작한 특집 다큐멘터리 <한지, 이천년의 여정>이라고 있어요. 너무 잘 만든 작품이에요. 기본적으로 거기에서 인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다큐 자체가 역사적인 사실이며 고증을 굉장히 성실하게 해냈기에 사실은 내가 영화 안에서 어떤 픽션을 통해 그 색깔이나 사실적인 부분을 절대 달리 가선 안돼요. 다만 그게 몇년 전에 만든 다큐이기 때문에 거기에 더해서 현재 많이 쓰고 있는 한지로 만든 옷이나 양말, 넥타이, 그리고 액세서리 할 것 없이 부가적인 것까지 다 수용해서 포함하려고 했어요. 이야기 전개와 무관하게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그런데 해보니까 그렇게 안되었어요. 한지의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 생활에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사실 지금보다 더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아요.

-영화에서 필용이 보는 TV다큐, 영화에서 지원이 만드는 다큐, 그리고 영화에서 마치 다큐처럼 촬영된 작업과정 영상 등 영화는 상당한 분량의 다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큐와 픽션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화에서 한지업자나 학자, 연구자 중에는 직업 연기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한데 섞여 있습니다. 픽션처럼 보이게 하는 연기자와 다큐처럼 보이게 하는 실제 전문가로서의 비연기자를 어떤 기준으로 나누고 배치했는지도 궁금합니다. =영화는 필용이 이리저리 부딪혀가는 가운데 한지에 대해 깨닫는 내용이에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을 기획하고 그를 추진하기 위한 모임이 구성되고 전문가나 제지업자나 교수들도 만나고, 또한 지질을 분석하는 기술자들도 있죠. 그리고 그 기술자들이 분석한 조건에 맞게 해달라는 주문도 합니다. 직접 공장도 찾아가고요. 소규모로 영세하게 작업하는 업자도 있고 큰 공장에서 기업처럼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모든 사람들이 다 카메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실제로 나눈 대화들을 그대로 대사로 썼어요. 저는 지금껏 어떤 픽션상의 역할이나 카메오를 지인들에게 부탁한 적은 있어도 그건 그냥 연기지 실제가 아니에요. 비전문연기자일 뿐이지 연기자처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는 실제 제지업자들을 그 역할 그대로 썼어요. 가령 천양제지 사장은 한필용을 ‘한 주사’라 부르면서 연기를 해야 하는데, 한참 자기 얘기를 하더니 ‘김 주사’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놀라서 ‘왜 한 주사를 김 주사라고 해요?’ 하고 물으니까 자기가 실제로 김 주사라는 공무원하고 이런 얘기를 했다며 그게 연기인 거 모른 거지요. 난 그런 착각이나 혼란스러움이 아마추어 연기자들이 전문가인 양 어설픈 연기를 하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자기가 했던 분위기 안으로 스스로 빠져들어가면서 진짜 한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거고 충분히 조율 가능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율한 그런 장면들에 만족하시는 편입니까. =처음에는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 실제로 잘됐어요. 제가 <달빛 길어올리기>를 통해 얻은 배짱이라는 게 있다면 그런 거지요. (웃음) 또 나중에는 내가 간이 더 커져서, 필용이 형사한테 심문받는 장면 있잖아요? 그거 진짜 형사예요. 그분한테 이 필용이라는 남자가 업자한테서 대략 뇌물을 받은 것처럼 누명 비슷하게 썼는데 고만고만한 문제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다, 뭐 그런 정도만 얘기해주고 알아서 연기하게 한 거죠. 내가 대사를 준 게 아니라 그 선에서 그 형사가 자기 대사를 만들어 그렇게 한 거예요. 저는 지금껏 그런 식으로 연출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식으로 나중에는 다큐에 대한 겁이 안 생겼어요. 오죽하면 한번은 강수연이 나에게 “감독님 이거 다큐예요?” 하고 묻기도 했어요. (웃음) 그런 게 만약 안 통하면 영화 전체를 잡아먹어버리는 모험을 하는 건데, 속으로는 불편한 것도 많고 그랬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놀랄 정도로 진짜 배짱이 생긴 거지요.

디지털로 만든다고 내 영화의 근본이 달라질까

-영화를 만드는 심정이 영화에서 ‘책임감’으로 한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지원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지원은 취재 도중 한지의 우수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역할도 합니다. =한지가 무조건 좋다는 건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건 제 태도와 같아요. 실제로 저도 그 순수성이나 목적성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나는 어떤 의뢰로 한지의 우수성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건 예술가의 자존심 문제가 걸려 있기도 해요. 따지고 보면 나도 과거 국책영화를 많이 만들어본 사람이에요. 그건 너무나 목적이 뻔한 영화고, 그런 와중에도 감독의 자의식을 담아낸다면 좋겠지만 그런 게 잘 안되는 게 또 국책영화거든요. <달빛 길어올리기>는 절대 국책영화는 아니지만 어떤 위정자들이 몰아가고자 하는 여론 형성이랄지 하는 것들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면 관객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균형감이라는 측면에서 다큐 감독에게 그런 시선을 준 거고 그 와중에 한지의 우수성이 자연스레 드러나야죠. 실제로 한지가 천년을 간다는 건 사실이고 소동파도 극찬을 했고 옛날 중국 사람들 중에는 한지로 집을 도배하면 그게 큰 자랑이었대요. 물론 한지가 모든 그림이 다 잘 그려지는 만능의 종이는 아니죠. 그런데 어쨌건 궁극적으로는 한지의 우수성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에 해외 영화제에서는 좀 보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해야 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다큐 감독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자기 책임감이라고 하거든요. 저도 그렇죠. 그런데 누가 이런 영화를 만들려고 하겠어요. 그러다 문득 ‘내가 영화를 얼마나 오래 할 거라고’ 하는 생각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필용의 아내 효경(예지원)은 영화에서 그림자 같은 존재고 사라져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빛이 들어오는 한옥에서 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요. 영화에서 한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맞아요. 한지를 상징하는 인격체로 설정한 인물이 바로 필용의 아내죠. 전에는 종이 만드는 가족 출신이라고 업신여김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서서히 영화의 중심에 놓이게 돼요. 사실 예지원씨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주로 명랑한 배역을 맡아왔다는데 전 그게 의외라고 생각했죠. 생김새도 그렇고 병석의 부인이라는 역할에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그렇게 늘 빛이 닿는 밝은 무대에 있던 배우라면 이번에는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겨보자, 하는 생각을 했고 참 잘해줬어요. 본인도 아마 많은 걸 느꼈을 거예요.

-이전까지의 100편으로 뭔가를 마무리짓고, 다시 첫 번째 영화를 만드는 신인감독 같은 마음이라고 얘기하신 적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달빛 길어올리기>는 감독님의 첫 번째 디지털영화라는 점이 상징적입니다. =디지털로 한다고 해서 내 영화가 뭐 근본적으로 달라지겠어요? (웃음) 디지털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근자에 와서 화질이 상당히 좋아졌더고요. 그러다 현상소에 계신 분을 한번 만난 적 있는데 앞으로 4, 5년 정도면 현상소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해왔지만 직접 그런 얘기를 들으니 뭔가 뒤통수를 쾅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러 면에서 테스트를 해보니 화면의 심도나 색감 같은 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명 방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도 했고요. 작업방식에서는 상당했죠. 과거 필름으로 한컷 한컷 찍을 때는 굉장히 긴장하고 정해진 앵글이나 틀 안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꺼려했거든요. 그런데 왜 요즘 젊은 감독들이 디지털을 선호하는지 알겠어요. 테스트도 자유롭고 위치나 앵글도 마음껏 바꿔볼 수 있고요. 하지만 수십년 동안 체질화된 고정관념 때문에 마냥 자유롭지만은 않았죠. (웃음) 이전 영화들의 현장에 비하면 정신적으로 해이해진다는 생각도 들고. 물론 그게 나에게는 단점이겠지만 요즘 젊은 감독들에게는 단점이 아닐 거예요.

젊은 세대들이 재밌게 봐줘야 할 텐데

-한지 만드는 과정을 영화 만드는 과정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닥’을 필름이나 디지털이라는 재료로 생각하고 좋은 닥과 좋은 물, 그리고 좋은 공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최상품의 한지를 지금껏 감독님께서 추구해오신 영화로 치환할 수도 있겠습니다. =필름을 닥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건 엄연히 서양의 것이고 디지털도 그렇지요. 우리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것이 아닌 것에서 출발해 기어이 우리 것을 담아내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한지를 사라져가는 필름으로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 보존의 문제를 신경 써야 하고, 영화에서 ‘옛날 한지 방식으로 만들면 생산비를 못 건진다’고 말하며 방식을 바꿔 생산하는 사람들을 디지털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요. 또 가격을 1만원 정도로 설정하는 장면이 있는데 누군가 옛날 방식으로 하면 10만원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도 하죠. 그런데 시장에서의 수요는 실제로 몇 천원 정도고요. 그 괴리는 어쩔 수 없는 가난한 예술가의 그것이죠. 그러면서도 필용이 얘기하는 것처럼 다들 자기가 최고라는 소리를 해요.

-<달빛 길어올리기>를 본 젊은 관객이 어떤 마음을 안고 극장을 나섰으면 하는 마음이십니까. =할리우드영화가 주는 흥미를 영화적 재미의 전부로 알고 자랐을 젊은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본다는 게 두렵기도 해요. 이런 영화를 보면서도 깊이 읽어내고 재밌게 봐줘야 할 텐데. (웃음) 어쨌거나 우리나라의 참닥으로 만들어지는 종이는 굉장히 좋은 종이에요. 질기고 결이 곱고 그걸로 못 만드는 게 없지요. 그런 닥의 성질로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의 심성에는 분명 그렇게 닥스러운 면이 있을 거라고 봐도 무리가 없어요. 영화 속의 한지와 닥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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