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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오해를 통해 이해로 갈 수 있다면

내러티브와 주제가 긴요하게 결합하는, 독특한 10대 남성드라마 <파수꾼>의 진가

윤성현의 <파수꾼>에 대해서는 이미 촌평(<씨네21> 782호 ‘2010 독립영화 결산 보고서’)을 쓴 바 있다. 짧게 썼지만 하려고 했던 말의 요체는 거기 다 들어 있다. <파수꾼>의 참된 성취는 2000년대 이후 세계영화의 흐름을 격변시킨 현대 내레이션의 혁신에서 찾을 수 있다. 홍상수와 박찬욱의 주목할 만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한국영화에서는 아주 드물게만 보여졌던 복합 내러티브(complex narrative)는 동시대 영화에 말할 수 없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역과 장르를 불문하고 복잡화된 현대적 삶의 양상을 담아내려는 작가들의 모색은 영화 내레이션의 본질을 근간으로부터 바꾸어놓았다. <파수꾼>의 감독 윤성현이 이같은 변화의 흐름을 의식하고 있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영화보기의 습성에 근원적인 개량을 요구하는 창의의 바탕은 이들과 유사하달 수 있겠다.

<파수꾼>의 표면은 10대 성장영화의 꼴을 하고 있으나 그 실질은 성장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소년기의 이상적 세대론에 부정의 자세로 선 이 영화는 그 시절의 시련을 통과의례나 당위로 묘사하지 않는다. 성장이 수반되지 않는 고통이라는 점에서 <파수꾼>의 소년기는 청춘영화의 범주를 벗어난다. 근자에 한국영화에 빈발하는 스타일적 편향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다르덴 스타일’의 계승이라는 특성도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촬영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이런 카메라 스타일이 그다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르덴 영화의 서명과 같은, 인물의 뒤를 따라가는 카메라의 정형화되지 않은 움직임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묘사하는 스타일은 미학적 상투구가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창동이 그러하며, <파수꾼>과 함께 언급되곤 하는 <무산일기> 역시 다르덴 스타일의 영향력 아래 놓인 작품이다. 따라서 들고 찍기와 인물의 후면 트래블링 숏으로 대표되는 스타일의 성취와 유습화된 남성 성장드라마의 한계를 초극한 장르적 세련이라는 관점을 이 글에서는 배제할 것이다. 그저 수컷 냄새나는 ‘작은 마초’로 고등학생 남자 아이들을 묘사하는 여느 10대 남성드라마와 구별되는 특이점보다 복합 서사를 택한 내레이션 전략, 내레이션이 주제와 긴요하게 결합되는 방식에 <파수꾼>의 진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멀티 캐릭터에 바탕한 비선형 내레이션

<파수꾼>의 가치는 미스터리에 기반한 다중 플롯, 중심 화자의 이동을 따르는 서사의 작동이 여하히 주제와 조응하는가에서 찾아진다. 이 영화의 서사는 멀티 캐릭터에 기초한 비선형 복합 내러티브의 특징을 보여준다. <파수꾼>은 내레이션의 조직과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관객의 정신작용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영화에서 다소간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 사건을 일정한 논리에 따라 배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은닉과 노출을 통해 조율되는 내레이션의 조직이다. 감독 윤성현은 <파수꾼>의 다중 플롯 양식을 스토리의 이전 단계들을 회고적으로 재구성하게 만드는 요소들에 의해 조직하고 있다. <파수꾼>은 전통적인 이야기체 영화에 일반화된 한명의 주인공이 끌고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의 인물이 특정한 논리에 따라 교대로 플롯을 끌고 가는 복합 캐릭터 영화이며, 시간은 연대기적 선형성을 도외시한 채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결과가 선행하여 보여진 뒤 원인을 파들어가는 추론의 방식으로 인과율의 순서를 뒤집는다.

<파수꾼>의 내러티브를 관장하는 것은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낀 서사의 몸통은 절개된 시간과 특정 시점까지 유보되는 인과관계, 의도적으로 판단을 흐리는 퍼즐 구조로 스토리 정보의 재진술 또는 확장을 유도하고 있다. 죽음을 감싼 미스터리 역시 하나가 아닌 복수인데,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의 이동을 동기화하는 것은 복수의 미스터리로 인해 유발된 질문들이다. 단지 미스터리의 해결방식에서만 이채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어나르는 동력(주 인물)의 교체에 따라 풀어야 할 퍼즐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이 구조는 기묘해 보인다. <파수꾼>의 서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마디마다 교체되는 인물들에 의해 국면이 갈린다. 전지적인 화자(윤성현 감독이다)의 조종 아래 움직이는 이들은 등장의 순서대로 기태의 아버지(조성하)-> 희준(박정민) -> 동윤(서준영)이다. 기태(이제훈)에게서 희준, 희준에게서 동윤에게 전해지는 낡은 야구공처럼 내러티브의 중심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뀌면서 이동하며, 미스터리의 속살도 모습을 드러내는 구조이다.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우리가 품게 되는 질문은 세 가지이다. 1. 누가 죽었는가?, 2. 왜 죽었는가, 3. 어떻게 죽었는가(타살 혹은 자살의 여부)이다. 세 가지 물음은 차례로 제기되지만, 한 질문이 종료되고 다음 질문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국면에 따라 둘 또는 세 질문이 동시에 던져지기도 한다. 새로운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그 해결은 각기 다른 인물에 의해 주도되는데, 누가 죽었는가는 기태의 아버지에 의해, 왜 죽었는가는 희준과 동윤에 의해, 어떻게 죽었는가는 동윤에 의해 진상이 드러난다. 아버지를 제외한 이들은 해당 국면에서 제기된 질문과 깊이 관계있는 인물들이고, 탐정이 되어 진상을 좇는 관객에게 그릇된 가설을 세우고 수정하도록 만든다. 굳이 세 인물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의 말미에 재론하겠지만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가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 세 인물이 알고 있는 정보의 질과 깊이의 차이 때문이다. <파수꾼>의 내레이션은 이 차이에 의해 작동한다. 의문의 사슬에 연루된 관객은 해답을 찾기 위해 나름의 가설을 세우지만, 짧고 결정적인 인식의 오류에 빠진다. 윤성현은 오인과 자각의 과정을 통해 불통의 관계로 파괴되어버린 세 주인공의 자리로 관객을 인도한다.

질문과 오답의 핑퐁 구조

우리에게 첫 번째 질문을 가져오는 인물은 아버지이다. 초반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그가 아는 건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미궁의 죽음을 탐문하는 아버지의 발길에 유인된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 미스터리를 해결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구조를 매설한 내포 화자(감독 윤성현)의 참의도는 미스터리의 해결에 있지 않다. <파수꾼>은 진상의 규명보다 진상 규명의 과정에 초점을 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죽음을 탐문하는 저널리스트처럼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재구성하기 위해 아들의 단짝 친구들을 찾아다닌다. 출발 지점에서 관객은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데, 어떤 정보도 없이 죽음의 진상을 밝혀야 하는 탐정이 된다. 여기까지 <파수꾼>은 다분히 흥미 본위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혼란은 처음부터이다. 포커스 아웃된 화면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희생자가 매질을 당하는 프롤로그 이후 바로 아버지가 등장한다. 죽음은 이미 발생하였다.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 누가 죽었는가? 프롤로그 뒤에 곧바로 죽음이 공표된다고 하는 배열의 순서를 고려한다면 죽음은 자연스레 피해자의 것으로 추론될 확률이 높다.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을 끌고 오면서 바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그제까지 그의 이름은 공표되지 않는다)이 소개되는 것도 이런 추론을 강화한다. 피해자인 듯 보이는 소년은 사악한 가해자(역시 이름이 공표되지 않는다)에게 가방을 빼앗기고 공터에서 치도곤을 당한다. 소름 돋는 폭력 앞에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이 소년이 희생자이리라는 것이 관객의 추측이다. 모진 매질에 우발(또는 의도)적으로 희생되었거나, 스스로 삶을 버렸거나. 나중에 밝혀지는, 죽은 소년의 이름은 ‘기태’인데 당시까지는 누구도 이름으로 불리지 않으므로 세 친구 중 누가 죽은 기태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최초 가설에 기대자면 <파수꾼>은 10대 소년들의 커뮤니티에 만연한 폭력의 양상에 초점을 둔 이야기가 된다.

이런 심증을 강화하는 단서는 더 있다. 당시까지 누구도 제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지만 폭력의 피해자로 보이는 소년은 유일하게 ‘배키’(또는 백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 친구 중 오로지 그만이 별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아주 분명하다. 아버지에 의해 죽은 아들의 이름이 ‘기태’로 공표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기태’와 ‘배키’를 연결시키도록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죽은 아이의 이름을 ‘백기태’ 정도로 유추할 수 있고, 학대를 당하는 소년 ‘배키’의 본명이 ‘백기태’이며 이를 줄여 ‘배키’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가설. 이 가설에 이르면 죽은 아이는 뭇매가 일상이 된 가련한 저 소년이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설을 세우도록 만드는 정보의 노출과 배열은 첫 번째 오인을 유발하는 함정이다. 영화가 시작된 지 15분경, 아버지가 ‘배키’로 불렸던 소년을 만나면서 최초 가설은 폐기될 운명에 처한다. 소년의 이름은 희준인데, 그러니까 그의 본명은 백기태가 아닌 백희준, 백희준을 줄여 ‘배키’(백희)로 불렸던 셈이다. 희준의 등장은 앞서 제시된 데이터들을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하도록 이끈다.

당연히 함정은 의도적으로 매설된 것이다. 극의 초반부 우리는 핵심 미스터리를 살인사건으로 여기고 탐사를 시작하는데, 명백한 피해자로 보였던 소년은 죽음의 주체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동시에 ‘누가 죽었는가?’라는 최초의 질문은 풀리는데 죽음의 주체는 가해자로 보이는 소년 기태임이 밝혀진다. 아버지의 역할은 여기까지이다. 아버지가 무대에서 퇴장하면서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이 한꺼번에 제기된다. (기태는)왜,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 더불어 <파수꾼>의 주제와 논점도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가해와 피해의 통념적인 관계를 뒤집는 이야기. 우리의 가설도 다른 방향으로 굴절되는데, 가해자가 죽음의 주체라면 피해자인 희준이 기태를 살해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희준을 만났을 때 뭔가 숨기려는 듯한 희준의 태도에 두 번째 가설은 힘을 받는다. 공분을 자아낼 만한 기태의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으로서의 불가항력적 살인.

또 하나 가지를 치는 가설은 사라진 동윤이 기태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다. 중학생 때부터 단짝 친구인 기태와 동윤의 관계는 기태와 희준의 우정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 시점에도 여전히 문제가 없어 보인다. 동윤에게 혐의를 두게 되는 것에는 역시 내포 화자가 관장하는 내레이션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다. 중반부까지 희준과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서 재구성되는 동윤은 죽마고우 기태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고(아버지도 이를 미심쩍어한다), 기태의 죽음 뒤 행방이 묘연하다. 아버지의 뒤를 좇아 사건을 추리해왔던 관객은 아버지의 의심에 동승할 수밖에 없다. 동윤이 기태의 죽음에 깊이 연루되어 있으리라는 심증은 종반부까지 해소되지 않는 채 의혹을 안긴다.

심지어 잠시나마 세 친구의 주변에 머무르는 인물 재호에게 의혹의 화살이 쏠리게 되는 순간도 있다. 한밤중 기차역에서 동윤이 사나운 기세로 기태를 공격할 때 재호 일행이 동윤을 집단 구타하는 장면이 그 순간이다. 친구를 돕겠다는 충심을 몰라주고 기태가 도리어 자신을 몰아세우자 재호는 원망의 시선을 던지고 그 자리를 떠난다. 잠깐이지만 배신감을 느낀 재호가 기태를 해하려 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게 되는 장면이다. 물론 이러한 가설들은 모두 오인을 유발하는 미끼이다. 질문은 꼬리를 물지만 단서는 제한적이기 때문에 오인이 발생하는데, 우리가 특정한 가설을 세우게 되는 것은 최소한의 정보로 내리는 판단에 불과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인의 내용이 아니라 끊이지 않고 오인의 연쇄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인물과 정보가 배열되는 논리

<파수꾼>의 내러티브가 이런 모양으로 짜인 것은 일차적으로 혼란을 주기 위해서이다. 오해로 인해 가설이 수정되고 질문이 바뀔 때마다 세 친구의 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재설정되고, 영화의 논점도 자리를 이동한다. ‘어떻게 죽었는가?’ 라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구해지면서 논점은 죽음의 대상이나 내용이 아니라 기태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경위로 모아지는 것이다. 중반부까지 가해와 피해의 구도는 명확해 보이지만 동윤에게로 서사의 중심이 옮아가면서부터 이러한 구도는 급격히 역전된다. 희준의 단락에서 기태는 완벽한 악마이다. 전적으로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상당 부분 희준의 입장에서 진술되고 있는 희준의 단락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가해자의 폭력성을 보게 만든다. 그러나 실종된 진실과 같은, 사라진 동윤이 돌아왔을 때 이들의 구도는 전면적으로 재설정된다. 그제까지 가해자는 잠재적인 피해자였으며 피해자로만 알았던 이는 드러나지 않은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런 자각의 순간 이 오인의 서사를 열고 비틀고 닫는 전략이 미학적으로 정당화된다.

마지막으로 중심인물과 질문이 배열되는 논리를 이야기할 때이다. <파수꾼>의 서사를 이끄는 세 질문은 각 인물들이 지닌 인식의 깊이, 정보의 성격에 따라 분류된다. 아버지-> 희준 -> 동윤으로 이어지는 릴레이는 얼마나 깊이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가와 관련된다. 사건의 전모를 밝혀줄 메신저로 보였던 아버지는 희준의 등장과 함께 홀연히 사라지며 이후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후반부에 아버지는 동윤을 찾아가지만 그에게 동윤이 어떤 말을 했는가는 의문에 부쳐진다. 아버지는 질문을 제기하는 메신저일 뿐 신뢰할 만한 화자가 아니다. 희준 역시 진실에 둔감한 자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최초의 계기는 교실에서 재호와 주고받은 엄마에 관한 밀어 때문인데 희준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대목의 묘사는 관객조차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게 처리된다. 기태의 폭력성이 증가하면서 희준은 기태의 적의만을 볼 뿐 화해의 제스처를 묵살했던 자신을 보지 못한다. 동윤은 조금 더 깊은 인식을 내면화한 인물인데, 대략 내러티브가 출발한 지 한 시간 뒤에 시작되는 동윤의 단락으로 접어들면 기태는 부서질 듯 여린 아이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동윤의 단락으로 넘어오면서 희준의 태도는 표변해 보인다. 바로 전까지와 달리 희준은 고분고분하지 않고 가시 돋힌 말로 기태의 심사를 후벼판다. 동윤의 단락은 야멸차게 존재를 부정하는 친구들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기태의 진상을 보게 만들면서 진실에 가까운 데이터를 제시한다.

이처럼 세 인물의 릴레이는 진실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인물(아버지)로부터 가장 가깝고 깊이있는 인물(동윤)에까지 동심원을 그리며 안으로 말려들어간다. 상이한 정보의 위계를 지닌 세 인물의 배열 순서는 적게 가진 쪽부터 많이 가진 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다중 캐릭터의 발길을 따라 걷는 미스터리 플롯의 조직에 있어 정보를 뒤로 미룬 채, 반복된 오해와 갱신된 질문 속에서 진실에 가까이 가는 구성을 취한 <파수꾼>과 같은 영화에 적합한 조직의 방식으로 보인다. 세 인물은 서사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지만 동시에 복합 내러티브에서 자주 발견되는 ‘믿을 수 없는 화자’(incredible narrator)이기도 하다. 그들은 각자의 기억과 인식에 의존해서 기태를 구성해낼 뿐이다. 그런 이유로 희준은 비교적 담담하고 소상하게 아버지에게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기태가 죽기 전 전학을 간 자신의 소재를 알려준 재호의 행동이 못마땅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에 비해 동윤은 아버지에게도 별다른 말을 한 것 같지 않고, 속으로 슬픔을 삭이는 쪽을 택한다.

이야기의 형식과 주제의 길항

서사의 전달이라는 기능으로만 보자면 <파수꾼>은 한번의 진술로 끝날 수 있는 이야기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윤성현은 각기 다른 면을 보고 있거나 일부만을 보고 있는 세 인물을 앞세워 부분에서 전체로 확대해나가는 방식을 씀으로써, 이야기의 내용이 아닌 이야기의 성질을 바꾸어놓는다. 이것은 잔재주에 의존하는 이야기꾼적인 자질만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정보의 위계에 따라 단락을 배열하고 관객의 기대심리를 유발, 배반하면서 서사를 조율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의 형식이 내용과 주제를 길항하는 그런 구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신뢰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내레이터가 진술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관객에게도 이 복합적이고 복잡한 내레이션에 적응할 수 있는 자질이 필요하다.

<파수꾼>의 다중 플롯 양식은 조각난 비선형 구조를 통해 보는 사람을 작중 인물들이 겪는 오해와 절망의 상태로 끌고 간다는 점에서 여느 이야기와 완연히 다르다. 어떤 사고나 언행을 낳은 인과의 논리나 그들의 관계를 탐색하여 드러내는 전통의 방식에 대한 증대되는 회의는 현대적 내레이션의 돋보이는 혁신이다. 프롤로그에서 기태는 속악하고 폭력적인 망나니지만 에필로그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와 부분만을 기억하고 살아갈 희준, 근사치의 진실에 다다른 동윤처럼 우리는 이 복잡하게 비틀린 이야기를 좇으며 영원한 침묵에 놓인 한 인간에 대한 오인과 수정을 반복하게 된다. 출발점에서 관객은 탐정이지만 지속적으로 판단에 실패하면서 자신의 오류를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릇된 가설이 유발하는 곡해, 가설과 재가설의 연쇄는 참담한 후과를 잉태하면서 가해와 피해의 이항대립을 둘러싼 통념을 혼란에 빠트린다.

<파수꾼>은 친구들간의 배신과 적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처 감지되지 않는 사소한 오해 또는 불통으로 인해 일어나는 영혼의 파쇄를 다룬다.

하나의 죽음으로 시작한 이야기에 세개의 질문과 오인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인식의 착오를 체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이야기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파수꾼>은 일면만으로 그려지지 않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알 수 없는 사이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한편 설 아문 생채기를 또다시 후벼파는 의도된 위악을 부리는 저들의 관계는 깊은 오인으로 점철되어 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끝내 깨닫지 못하는 소년들처럼 우리는 지속되는 오인의 구조 속에서 이 오해의 참극에 가담하게 된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기태에게는 항변의 기회가 없다.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세 인물에 의해 재구성될 뿐인 기태는 대립과 균열의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에는 포악한 악마였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버림받은 희생자와 같은 기태의 모습은 딱히 무엇이 진짜라고 말하기 힘들다. 오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이런 사실들이다. 그러므로 의도치 않았으나 반복된 오해로부터 비롯되었던 기태의 죽음을 당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것이 이 추상화 같은 이야기를 세밀하게 조직해낸 탁월한 내레이션의 효과라고 생각한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서울국제가족영상축제 프로그래머. 재는 것 없이 원껏 써보라는 <씨네21> 편집진의 주문을 따라볼 생각이다. 한편의 영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기보다 좁은 주제로 깊게 파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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