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손님> <멋진 하루> 모두 다이라 아즈코의 단편을 토대로 했다. 이번 작품도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아레노의 단편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가 원작이다. =3~4년 전에 읽고 마음에 뒀던 단편 중 하나다. 단편이지만 그 속에 여러 의미가 함축돼 있더라. 소설에 살을 붙이고 재해석을 하면 영화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다 생각했다. 혹 단편을 손쉽게 영화화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막상 시나리오로 옮기는 과정은 오히려 까다롭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편이다.
-원작의 어떤 부분에 주목한 건가. =설정 자체가 색다른 이별이다. 영화로 풀면 재밌는 영화가 되긴 힘들어도 적어도 특이한 영화는 되겠다 싶더라. 원작은 두 남녀의 미묘한 감정을 좀 다른 방식으로 숨기고 있다. 난 책에서 숨기고 있는 그 부분을 해보고 싶었다. 원작과는 다른 구성으로 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거다.
-극도로 단출한 구성이다. 남녀가 이별을 말하는 차 안의 오프닝신과 나머지는 집 안에서 벌어지는 한나절로 이루어진다. =아마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단출하지 않을까 싶다. 해외영화를 뒤져봐도 관 속에서만 찍은 <베리드>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웃음) 그런데 사실 공간이 한정적이라서 그렇지 갑자기 등장하는 옆집 고양이는 버라이어티하다. 액션영화의 한 장면에 버금가는 장치다.
-거의 실시간의 감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프닝신의 차 안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헤어지자’고 하고 그 다음 장면이 여자가 집을 나가기 전날의 집안 풍경이다. 생략되었지만 차와 집 장면 사이에 여러 날이 지났을 거다. 그 사이에 서로 화해도 시도해봤지 않겠나. 그런데 그런 장면들을 모두 다 설명했다면 집중력이 떨어졌을 거다. 좀 압축적으로 이별의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으로 갑자기 뛰어들어가서 그걸 지켜보는 방식이다. 마치 마지막 순간을 보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줘야 두 남녀의 급박한 심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남은 사랑에 대한 일종의 미련 말이다.
-감정의 폭발을 좀체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별과정이다. 간신히, 여자가 남자를 탓하려는 순간이 조성돼도 번번이 불발된다. =만약 둘이 감정을 터뜨릴 수 있다면, 그런 순간이 존재한다면 둘에게 이런 이별의 순간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헤어지자고 하는 첫 장면부터, 당장 차 세우고 대판 싸웠겠지. (웃음) 감정을 솔직히 발설하는 건 두 남녀 모두에게 낯선 일이다. 갑자기 들어온 옆집 고양이가 그 폭발의 순간을 방해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결혼 생활 5년 동안 이 부부는 늘 그랬을 거다. 결국, 이러니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됐지, 싶은 마음이 들게 되는 거다.
-둘 모두 이별 앞에서 ‘괜찮다’는 말을 습관처럼 연발한다. 정말 괜찮아서라기보단 불안감에 대한 일종의 다짐 같다. =‘괜찮다’라는 말은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좋아도 괜찮다고 하고, 싫어도 괜찮다고 할 수 있다. 내뱉는 쪽에서야 배려에서 나온 말일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은 어느 순간, 정말 괜찮은지 의심하고 짜증도 나게 된다. 영화 속 남자는 워낙 배려가 습관화된 사람이다. 여자도 그런 남자의 성격을 아니 배려 차원에서 남자를 닦달하지 않는다. 결국 배려가 화를 불렀다. 서로의 배려가 얽히고설켜 더이상 갈 데가 없어진 상태. 남녀 사이에 이런 선의(배려)야말로 어떤 의미에선 결코 미덕이 될 수 없다.
-영화 속 남녀는 커피, 식습관, 관심 분야를 완벽하게 공유하는 모던한 커플이다.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로 서로에 대한 관심을 탐지하는 게 요즘 세대의 사랑처럼 인식되는데도 결국 부부는 파경에 이른다. 이 부부에게 더 절실한 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난 이 부부가 결국 한몸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도 나고, 너도 나인 거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둘의 관계가 더 어려워진다. 공통점도 많고 공유하는 것도 많지만, 그게 관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가까운 사람 혹은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오히려 파국으로 가기 쉽다.
-<여자, 정혜>의 경우가 특히 그렇지만, 보통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의 입장이 앞선다. 그런데 이번엔 현빈이 연기하는 남자캐릭터가 당신 영화의 여성상을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작은 화자가 여자였다. 그런데 영화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두 사람의 감정을 평행선에 놓고 가자고 계획했다. 그런데 여자가 의사표시도 더 많이 하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자가 더 드러나게 됐다. 남자가 여자의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존재하게 된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현빈의 표정이 드러나는 장면이 많지 않았다. 현빈이 본인 얼굴은 언제 찍냐고 물었을 정도니까. (웃음)
-차 안, 집 안 모두 실내공간의 감정변화를 기술한다면 외부적으로는 궂은 날씨가 끊임없이 이들을 묶어둔다. =원작의 설정이 좋더라. 두 남녀가 폭우로 집에 고립된 상황이 서로 갈등을 더 부추길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극대화하고자 했다. 울어도 시원찮을 상황인데도 울지도 않고 애써 덤덤한 척하는 이들에게, 비가 눈물 역할을 대신 해줄 수 있다. 덕분에 비 연출에 애를 먹었다. 자연광이 들어오면 안되니 집 안에서도 햇빛을 피해서 찍고 비도 많이 뿌렸다. 비의 양만 따지면 우리 영화도 블록버스터급이다. 12일 동안 내내 뿌렸으니, 한국영화 중에 제일 많이 뿌린 거 아닐까.
-광활한 인물의 집이 주는 공간의 역할도 크다. 둘이 함께 기거하는 평면의 공간이 아닌, 각자가 서로 다른 층을 점유하고 동떨어져 있다. =한정된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유리되어 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구조를 연출했다. 그래야 둘을 바라보는 관객에게 쉽게 둘의 감정을 설명해줄 수 있겠더라. 한번 지나간 곳을 또다시 지나가고 그걸 반복하면 지리함도 있겠지만, 그동안의 쓸쓸함이 공간과 함께 느껴질 것이다.
-전작의 배우들의 도움이 컸다. 김지수를 비롯해 김중기, 김혜옥 등이 참여했다. 게다가 <멋진 하루>의 하정우는 목소리 출연도 했다. =아는 사람들 등친 거다. (웃음) 영화 찍기 전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계속 죽는 소리를 했다. 일종의 밑밥을 친 거다. 그 다음에 ‘잠깐 와라’ 하면 다들 뭘 부탁하려는지 안다. 도와줘야겠구나 하는 거다. 이렇게 영화를 하면 안된다. 근데 찍기는 해야겠고, 이때 아니면 영영 못 찍을 것 같고. 그러니 절박해지는 거다. 난 다른 감독보다 끈기가 부족해서 어떻게든 끌어와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항상 있다.
-영화에 가장 동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이 초대받지 않은 낯선 이웃(고양이, 부부)의 등장이다. 멜로드라마가 아닌 스릴러적인 구성으로 돌변하는 지점이다. 그 전환에 카메오 배우들의 역할이 컸다. =영화와 원작이 가장 다른 지점이다. 소설에선 이웃집 사람들이 바로 자기들 고양이를 찾아가는 건데 여기선 집 안에서 사라진 고양이 때문에 스토리를 만들게 된다. 일종의 판타지적인 연출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부부가 꿈을 꾸는 상황일 수도 있다. 옆집 고양이가 난데없이 등장하는 것부터 암시적이다.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 정확한 타이밍에 둘의 불화에 끼어든다. 둘이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하고 가정하거나 동시에 상상해보는 거다. 환기를 시켜보잔 의도가 있었다. 더불어 관객이 낯선 이들의 등장을 보고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게 아닌가, 혼란을 주는 거다.
-제작비 10억원 미만의 저예산이다. 주연배우의 노개런티가 이런 방식의 작업을 가능케 만들었다. =모든 게 제한된 조건이었다. 밖에서 보면, 현빈 임수정 같은 톱배우들이 출연하니 풍족하게 촬영할 줄 알지만 촬영하다 보니 이것저것 상황이 안되는 게 너무 많았다. 톱배우들이 참여해도 저예산은 저예산이다. 똑같이 힘이 든다. 준비 한달하고 13회차 촬영을 보름 만에 끝냈다. 임대한 공간이라 기간이 제한돼 있었고, 배우들 시간을 많이 뺏을 수가 없었다. 게다 단편영화인 줄 알고 참여한 스탭도 많아서 빨리 일정을 맞춰야 했다. 시나리오 보면 대사도 별로 없고 공간 이동도 없으니 40분 중편영화인 줄 알았다더라. (웃음)
-전작 <멋진 하루>가 ‘전도연 효과’를 보면서 화제를 모았다. 저예산영화일수록 배우의 역할이 크다는 걸 입증해준 경우이기도 했다. =전도연, 현빈의 인기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스코어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내가 그들을 캐스팅하는 건 최소한의 인지도를 보장받는 것이 조금이라도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배우 역시, ‘이윤기 감독이 너무 대단하니 한번 참여해보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이런 방식의 작업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온다. 그 이해가 딱 맞아떨어질 때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이런 방식이 화제가 되면 저예산영화의 저변이 넓어질 테고, 그 때문에 신인감독이나 신인배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질 수 있다.
-다음 작품 계획은. =정해진 건 없다. 나 역시 규모가 있는 대중영화, 멜로나 코믹 이런 부분도 충분히 고민하고 상의한다. 일단 이번 작품이 욕을 먹어도 좋으니 원래 예상보다 관객이 좀더 들었으면 좋겠다. 해외에도 판매가 잘돼서 투자의 길을 열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영화라는 게 내가 하고 싶다고 만들 수 있는게 아니라, 늘 잘라내는 한숨이 백개는 되는 것 같다. 남녀 관계를 떠나 좀 넓혀서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남녀가 소통하지 못하는 게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심정일 것 같기도 하다. 소통이 될 것 같은데도 도대체 소통이 되지 않고, 뭐가 안되는구나 하다가 결국 화장실 가서 혼자 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인 거다. 말하다 보니 이렇게도 연결되는구나. 내가 너무 확대 해석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