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이다. 언제부터 ‘복지’라는 단어에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녔을까. 복지 포퓰리즘을 응징하겠다는 결의에 찬 시장님의 행보를 지켜보는 시간은 괴롭다기보다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그와 동시에, 늘 죄사함을 받는 초절정 능력자 이건희 회장님의 손자마저도 무상급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복지란 무엇이고 어떻게 실행되어야 하는가. 논란은 계속되지만 불행히도 복지라는 단어는 선거철이 아니면 정책 입안자들의 입에서 구경하기 힘든, 멸종 위기에 처해버렸다.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자유시장과 복지국가 사이에서 제기되어야 하는, 또한 응당 응답받아야 할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포스트 워 1945~2005>로 전후 유럽사를 통찰하는 안목을 보여준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으로, 그가 루게릭병 진단을 받아 전신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쓰였다. “한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이 되어버린 육체의 한계에 투항하는 대신 현실을 바꾸는 과감한 상상을 펼쳐 보였다. 상상이라고 말은 했지만 이 책은 전후 유럽과 미국이 복지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살핀다. 그 과정에서 토니 주트는 ‘평등한 가난’에 대한 향수에 젖지 않으며, 양비론의 함정에 빠지거나 손쉬운 회의주의를 선택하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모든 사고의 기본 전제가 되어버린 듯한 신자유주의 이전의 세계 논리를 이야기하고 지금 상황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논의의 기반이 되는 쟁점을 제시한다. 무상급식 문제와 연관해 생각해볼 만한 선례를 책에서 만날 수도 있다. 1996년 미국에서 제정된 개인책임과 노동기회조정법은 유급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복지 혜택을 박탈했다.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자리라도 받아들여야 했고, 결국 노동자의 임금과 사업 비용을 동시에 떨어뜨렸다. 게다가 복지에는 낙인이 찍혔다. 공공 부조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양육 보조금이든 식료품 구매권이든 혹은 실업수당이든 그 종류와 관계없이 카인의 낙인이나 다름없었다. 때로는 그 과정에서 굴욕적인 ‘자산 조사’가 이루어져 빈곤의 진위를 확인하는 공무원들이 제멋대로 집안을 휘젓고 갔고,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적선에 가까운 경제 보조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세계가 앓고 있는 질병의 많은 증상들은 고전 정치 사상의 언어 속에서 가장 잘 진단될 수 있다. 토니 주트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는 부정의, 불공평, 불평등 혹은 부도덕 등이 나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을 뿐이다.” 침통함과 울분, 억울함을 뛰어넘는 수긍과 긍정, 희망이 가능할까. 심지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고전 정치 사상의 언어로? 토니 주트와 그의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아름다운 까닭은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