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마지막 단락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찰나’의 아름다움. <블랙 스완>은 이 찰나를 위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의 날갯짓을 닮은 영화다. <레퀴엠>의 원제였던 ‘Requiem for a Dream’은 그의 이후 영화를 압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블랙 스완>은 아름다움을 위한 진혼곡, 또는 도약하며 완성한 아름다움이 칼날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의 비극적 운명을 담는다. 어쩌면 그것은 공연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의 본질이기도 하다. 완성된 순간 사라지고 마는. <블랙 스완>이 스스로를 죽여야만 완성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아름다움 그 자체가 영화의 목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분명 <블랙 스완>은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백조와 흑조간의 끊임없는 자리다툼을 비추는 ‘거울’의 영화다.
아름다움을 비추는 신체 잔혹의 거울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는 백조의 자리를 훔친다. 즉,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흑조가 차지했음을 깨달았을 때 백조는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진다. <블랙 스완>은 <백조의 호수>를 단지 영화에서 공연되는 하나의 작품으로 차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영화는 로스바르트가 마술을 걸어 오데트를 백조로 변신시키는 니나(내털리 포트먼)의 꿈으로 시작해 호수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을 맞는 공연 속 장면으로 끝맺음으로써 내러티브 전체를 <백조의 호수>와 조응시키려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백조의 호수>를 해체해서 노골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겠다는 토마스(뱅상 카셀)의 선언은 <블랙 스완>을 연출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적 야심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토마스가 <백조의 호수>를 어떻게 변형했는지 구체적으로 전달받지 못하지만, <블랙 스완>의 전개 과정은 토마스의 새로운 시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보여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보기에 발레의 아름다움이란, 마치 창에 비친 모습을 보려면 그 바깥이 어두워야 하는 것처럼, 그 세계가 바깥으로 내몰며 감추거나 부정했던 것들에 비쳐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동작들이 펼쳐지는 무대 위 발레의 세계가 아니다. 그가 <백조의 호수>(또는 발레)에서 발견한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꽃이 전혀 아름답지 못한 것에 뿌리를 둘 때만이 만개할 수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그는 무대 위의 아름다움을 조탁하는 무대 뒤편의 사건에 집중하려 한다.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의 자리를 흑조가 탐하는 것처럼, 이전의 발레 스타였던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자리는 니나가 ‘훔치고’(오디션 바로 직전에 니나는 베스의 분장실에 몰래 들어가 베스의 립스틱을 훔친다), 니나의 자리는 그녀의 동료들뿐 아니라 전세계의 발레리나들이 넘본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에게 백조는 자신의 자리를 탐하는 수많은 발레리나들(흑조)에 대해 히스테리적 불안에 시달리는 유리처럼 깨어지기 쉬운 연약함의 표상일 뿐이다.
하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발레를 소재로 택한 이유는 발레의 아름다움이 근본적으로 극한의 신체적 고통을 대가로 해야만 실현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통은 결코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 없다면 발레의 아름다움은 존재할 수 없다. 대런 애로노프스키에게 예술적 아름다움과 신체 한복판에 ‘시뻘겋게 아가리를 벌린 상처’(심리적, 신체적 모두의 의미에서)는 분리할 수 없다. 물론 <블랙 스완>은 이러한 발레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심리적 환각을 통해 드러내는 작품이다. 영화에 환각의 형태로 등장하는 모든 신체적 변태(metamorphosis), 즉 손가락의 살갗이 벗겨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느닷없이 관절이 골절되고, 어깻죽지의 발진에서 깃털이 새어나오다 못해 이내 온몸이 흑조로 변하는 등의 호러영화적인 신체적 변형은 발레 특유의 특성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신체적 아름다움의 표현인 발레라는 예술이 신체를 가장 잔혹하게 다루는 호러영화의 표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블랙 스완>이 보여주려는 세계다. 무대에서 ‘보여지는 것’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하지만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관심은 후자다.
흑조와 백조의 자리바꿈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블랙 스완>에서 좀더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니나의 심리적 세계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블랙 스완>은 니나가 화면에서 생략되는 순간이 거의 없을 만큼 시종일관 니나를 좇는다. 이는 <블랙 스완>이 클로즈업의 영화라는 것, 즉 발레를 소재로 하면서도 무대에서의 신체적 동작 전체를 강조할 수 있는 롱숏보다는 ‘심리적 미로’에 갇힌 니나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뒤따르는 영화로 완성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과 환각 사이에서 길을 잃은 니나는 그리 신뢰할 만한 화자가 아니다. 우리가 니나의 심리적 필터에 여과된 세계에 대해 그것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해도, 그러한 구분이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주된’ 관심은 아닌 듯하다. 그는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사라지며 미로가 되어버린 니나의 ‘심리적 현실’을 우리가 유사 체험하기를 바란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상상하게 하기보다는 (시청각적인 연출을 통해)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감독이고, 이는 그의 최고의 작품이었던, 하지만 이제 그 자리를 <블랙 스완>에 물려줘야 할 <레퀴엠>에서 충분히 증명한 바 있다.
우리는 <블랙 스완>에서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지워진 니나의 심리적 미로가 흑조를 표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결과물이라 생각하기 쉽다. 즉, 어둠의 충동을 대변하는 흑조를 연기하면서 흑조가 되어가는 니나. 틀리지는 않지만,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그녀가 백조/흑조 역을 맡기 전부터 그녀 내면에는 흑조의 잔영이 날갯짓하며 파닥거리고 있기 때문이다(이는 비유가 아니다. 지하철이 처음 등장하는 신을 보고 들어보라). 그러니까 니나는 원래 백조였는데 흑조로 변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녀는 애초부터 이중적 상태에 있었다. 니나에게 발생하는 백조와 흑조의 자리바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가 히스테리적 주체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무의식적 질문에 빠져 있는 주체다. 우리는 니나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 곧잘 그녀의 시점숏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초반부 프리마돈나를 뽑는 오디션에서 그녀가 춤추는 장면부터 영화 말미의 공연에서 그녀가 실수하는 장면까지, 춤추는 장면에서 니나의 시점숏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카메라는 니나와 함께 춤을 추듯 그 주변을 돌다가도 그녀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할 때마다 그녀의 시점숏을 잡으며, 그녀의 히스테릭한 질문을 시각화한다. 그것이 백조이든 흑조이든 간에 니나의 정체성은 그 질문, 즉 ‘타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으로 형성된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시됐던 백조로서의 니나에게 그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녀의 엄마(바버라 허시)였을 것이다. 집안을 가득 채운 인형과 화이트와 핑크 중심의 옷들과 공간 구성뿐만 아니라 불감증 같은 그녀의 성격 역시 그 응답의 결과다(그녀 등 뒤의 발진은 그 응답의 실패이자 그녀의 엄마도 니나처럼 결핍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징표일 것이다).
하지만 <백조의 호수>의 백조/흑조의 프리마돈나를 맡으면서 니나가 직면한 것은 새로운 타자의 욕망이다. 질문 자체는 동일하지만, 토마스가 그 질문의 ‘타자’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결국 그녀를 헤매게 하는 심리적 미로는 토마스와 엄마가 벌이는 자리다툼의 결과이고,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환각이 아니라 두개의 허구적 세계가 대립하며 뒤섞인 결과이다. <블랙 스완>이 발레를 소재로 하는 이상, 더군다나 완벽을 꿈꾸는 니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상, 그 대결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백조의 호수>에서 왕자를 유혹하는 것이 흑조이듯, 토마스는 흑조의 유혹을 그녀에게 요구한다. 유혹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환상 안으로 들어가 욕망의 대상-원인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면, 이는 발레리나의 필연적 숙명이자 그들이 좀더 충동에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술과 마약이라는 단순한 차원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 니나에게 추파를 던지는 노인의 추악한 행동이나 스스로 차도에 몸을 던지고 손톱손질 칼로 얼굴을 찍어대는 베스의 행위를 추동시키는 충동과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충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아름다움은 자신이 부정하는 것들로부터 완성된다. 혹은 그에 자신을 비춘다. <블랙 스완>이 무대 위에 올린 아름다움이 우리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 속에 자신의 파멸이 잉태된 내적 긴장을 너무도 처절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환각에서 벗어난 실재의 아름다움
이 단락부터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가 늘 무언가에, 혹은 어딘가에 갇힌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해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파이>에서 수의 세계에 갇힌 자에서부터, <레퀴엠>에서 마약과 TV에 중독되어 갇힌 자들,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족쇄에 묶인 자들, <더 레슬러>에서 1980년대의 향수를 가득 담은 링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자까지, 그의 인물들은 마치 운명처럼 구원의 길에서 파멸의 길을 만나곤 한다. <더 레슬러>에서 랜디(미키 루크)는 그 운명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숭고함의 영역으로 도약한다. 물론 그가 선택한 것은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허구(환상)의 세계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블랙 스완>에서 백조처럼 순수하고 연약한 니나의 몸은 흑조를 가둔 감옥이다. 또는 그녀는 백조의 세계에 갇혀 있다. 실제로 영화는 흑조로 표상되는 사악하고 자기 파멸적인 힘을 때로는 자유 의지와 등가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의 흐름상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해도,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영화의 어느 순간부터 흑조를 가두는 감옥은 백조의 몸이 아니라 흑조가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강박관념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니나는 릴리(밀라 쿠니스)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깨닫기 전까지는 자신만의 환각 속에 존재했다.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추던 카메라는 무대 뒤쪽으로 물러나서 흑조가 된 그녀를, 아니 흑조의 환각에 빠져 있는 그녀를 ‘객관적인 숏’으로 잡아낸다. <블랙 스완>이 니나의 심리적 세계를 주관적으로 보여주는 데 치중했음을 주목한다면, 그 환각이 최고점에 달한 순간을 객관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환각 속에서의 유혹의 성공(토마스에게 키스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발을 보라), 혹은 주관적 환각의 객관적 승인. 하지만 자신이 완벽했다고 말할 때, 그녀는 여전히 환각 속에 있는가, 환각에서 깨어난 것인가? ‘깨진 거울 조각’으로 강박관념의 소산인 릴리를 찌른 것이 자신의 환각임을 그녀가 깨달았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녀가 환각에서 깨어났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특히 엄마를 향한 그녀의 마지막 시점숏을 고려할 때) 그녀는 상처받은 백조라는 또 다른 환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토마스의 말을 다소 수정해서),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인정하고 그에 몸을 맡긴 채 그저 흘러가게 놔두는 초월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혹시, 니나의 찢겨진 상처만이 그 해답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가 죽인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털리 포트먼이 오로지 얼굴의 힘만으로 무성영화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한 인식의 순간, 카메라는 그녀의 시뻘겋게 벌어진 상처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상처는 그녀가 무대에서 춤을 출 때 그 입을 더 크게 벌린다. 우리는 이 상처가 상징화된 육체, 즉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상징화해야 하는 발레리나의 상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미 주어진’ 상징화된 육체를 스스로 찢어버릴 때 완성될 수 있는 실재의 아름다움. 물론 이와 함께 제기되어야 할 질문은 무엇이 니나에게 그 상처를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거울의 파편. 지금껏 그녀가 타자의 욕망에 대한 반영으로서만 존재했다는 것의 흔적. 만약 완벽함을 느꼈다는 니나의 말이 이에 대한 인식의 결과라면, 그녀는 환각 너머의 실재로 도약한 것이다. 그것이 비록 칼날 위로 떨어지는 찰나의 아름다움이라 할지라도.
안시환 몇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영화 비평에 학위와 지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면서 정작 본인은 역사영화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