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영화계의 숨은 블루칩으로 은근히 회자됐던 인물이 바로 박훈정 시나리오작가다.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와 류승완의 <부당거래>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주인공으로 알려지면서 제법 유명세를 탔다. 충무로 감독 중에서 장르적 감식안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두 감독을 단숨에 매료시킨 작가였던 것. 그렇게 두 영화의 신속한 영화화와 더불어 그 자신이 역시 직접 쓴 시나리오로 같은 해 입봉한다는 소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비록 완성 이후 올해가 되어서야 개봉하긴 했지만 <혈투>에 쏟아지는 호기심도 그런 기대 때문이다.
당쟁과 외압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조선 광해군 11년. 명나라의 강압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에 파병된 조선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대패하고 세명의 조선군 헌명(박희순), 도영(진구), 두수(고창석)는 적진 한가운데의 객잔에 고립된다. 명령을 어기고 일찌감치 달아나 숨어 있던 두수의 객잔에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의 두 남자가 당도한 것. 자신이 도망쳤던 사실이 탄로날까봐 두려운 두수는 두 사람 앞에서 쩔쩔매고, 헌명과 도영은 서로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엇갈린 과거가 서서히 드러남을 깨닫게 된다. 헌명이 도영을 증오했던 이유, 도영이 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했던 이유가 밝혀지면서 그 충돌은 격해진다. 그런 한편으로 청나라 군사들이 객잔으로 서서히 압박해 들어온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 그리고 데뷔작인 <혈투>에 이르기까지 박훈정 감독이 매혹을 느끼는 소재는 명확하다. 개성 강한 남자들의 극한 대립과 출구를 만들지 않고 몰아붙이는 저돌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캐릭터들에 대한 이끌림이다. 그런 점에서 시대극이라는 결정적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혈투>의 세 남자는 순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접촉과 반목을 거듭하는 <부당거래>의 주양(류승범), 최철기(황정민), 장석구(유해진)를 닮았다. 더불어 이처럼 남자 캐릭터에 열중하면서도 거의 체질적이라고 할 만큼 동지애나 의리를 배제하는 경우도 드물다. 잠시도 인물간의 심리적 스킨십을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혈투>의 세 남자는 연극적 문어체의 헌명, 현대적 구어체의 도영, 그리고 코믹한 사투리의 두수 등 마치 일부러 제각각 서로 다른 언어를 부여한 느낌이다. 그의 작품 속 캐릭터가 지니는 매력은 그런 점들에서 기인할 것이지만, 같은 이유로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캐릭터들에 답답하고 삭막한 거리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박훈정은 <혈투>에서 좀더 욕심을 냈다. 그들을 객잔이라는 한 공간에 가둬두고 밀도를 높이는 모험을 한 것. 구수한 사투리의 두수가 여백을 만들며 숨통을 틔우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혈투>는 팽팽한 심리스릴러다. 그들 사이의 물고 물리는 관계를 드러낼 때의 긴장감은 역시 박훈정답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명령을 어긴 채 전장을 도망친 천민 출신 두수의 조바심, 권력 다툼에 내몰려 함께 출정했지만 비밀을 숨기고 있는 헌명과 도영의 갈등이 한데 엮여 있다. 게다가 둘 사이의 비밀은 상대가 전혀 알아듣지 못할 거라 여기고 거의 죽기 일보 직전 유언처럼 고백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혈투>가 앞서 두 작품과 다른 것은 플래시백을 통해 인물들의 ‘사연’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고, 또한 거기에 약점이 숨어 있는 것 같다. 한정된 공간이라는 한계를 플래시백을 통해 확장하고 있긴 하지만 갈등을 드러내고 봉합하는 그 의존도가 높아 보인다. 그래서 과거와 연결 지어 현재의 갈등을 설명하는 것만큼, 바로 지금 그 현재의 객잔에서 벌어지는 디테일들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한편으로 압박해오는 청나라 군사들의 위압감도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혈투>는 지난 몇년간 나온 시대극 중 가장 독특한 형식과 소재의 작품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평자에 따라서는 계급갈등의 문제나 은유적으로 이라크 파병이라는 상황까지 충분히 끌어들일 만한 매력적인 컨셉을 지니고 있다. 여하튼 직접 쓰거나 연출한 작품들을 통해 최근 이 정도로 일관성있고 명료하게 자기 세계를 드러낸 작가가 있었나 싶다. 시나리오건 연출작이건 <혈투> 이후의 작품이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