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 세계를 떠나와 안개 자욱한 문을 통과해 림보(limbo)에 들어온 그들 사자(死者)들은 3일 안에 선택을 해야만 한다. 자기 삶에서 꼭 간직하고픈 단 하나의 기억의 단면을 말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승에서의 다른 모든 기억들은 잊어버리고 대신 자기가 고른 특별한 기억 하나만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그러나 와타나베라는 한 노인은 과연 과거 자기의 어떤 기억을 영원의 세계로 가지고 가야 할 것인지 도무지 용단을 내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지난 칠십 평생을 리뷰(review)해 보기로 한다. 림보의 면접관 모치즈키가 와타나베에게 가져다준 비디오 테이프들에는 와타나베의 지난 삶의 모습들이 담겨 있다. 이 과단성 없어 보이는 노인이 자신의 과거를 살피느라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우리는 TV 화면에 담겨 있는 그의 지난 삶의 어떤 모습들을 흘낏흘낏 쳐다볼 기회를 갖게 된다. 바로 그때, 어느 정도 주의력을 가진 관객이라면 TV 화면에 담긴 이미지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유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아래에서 위쪽을 약간 쳐다보는 듯하는 앵글하며 정제된 구도로 이뤄진 그것은 영락없이 오즈 야스지로적인 이미지였던 것이다. 즉 어떤 이의 과거를 반추하고 재현해내는 이미지,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영화에 기대어서 주조되는 이미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은 영화처럼 우리 앞에 상(像)을 맺는다는 것이다.
영화, 기억을 다시 쓰는 도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이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리뷰들이 한목소리로 밝히고 있듯이 다른 무엇보다도 기억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영화다. 다시 말해 이건 죽은 자들이 이승과 저승사이의 어느 경계에 놓인, 종종 림보라 불리는 곳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해내고 또 그것을 ‘재연’해낸 뒤 비로소 제대로 ‘죽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억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영화다.
<원더풀 라이프>를 특히 흥미로운 영화로 만드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 그 기억의 문제란 것을 조망할 양으로 영화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죽은 자들이 어떤 기억을 고르겠다고 결정하면 림보에서 일하는 면접관들은 그 기억들을 소상히 기록해 그것을 짧은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 그곳의 면접관들은 확실히 영화의 스탭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자들이 들려주는 회상을 밑그림 삼아 적절한 소품과 배경을 준비하고 심지어 배우도 데려와서는 필름 위에 사자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재연해놓는다. 그렇게 해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의 머리 속에 형체없이 어렴풋한 흔적으로만 남은 과거의 기억은 선명하게 현재화하게 된다. 그리고 망자들은 이미지화한 그 기억을 자기 머리 속의 스크린에 상영하고는 그것을 고이 간직할 수 있게 된다.
기억에 대한 명상을 자주 끌고 들어오는 크리스 마르케의 에세이 필름 <태양없이>(1982)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기억하는(remember) 게 아니라 역사가 다시 쓰여지듯이 기억을 다시 쓰는(rewrite) 것이다.” 이 말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면, <원더풀 라이프>에서의 영화란 기억을 다시 쓰는 도구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실제로 앙드레 바쟁을 읽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여하튼 <원더풀 라이프>에 등장하는 영화라는 것은 바쟁적 의미에서의 그것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보인다. 바로 바쟁이 생각했던 관념론적인 현상으로서의 영화라는 개념 말이다. 바쟁은 영화란 기술적·산업적 현상이라기보다 먼저 관념론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지금 보는 식의 영화가 실제로 모습을 갖추기 이전부터 사람들의 두뇌 속에서 순전히 이념적인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 ‘영화’가 이미 확고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원더풀 라이프>에서의 영화도 분명 그런 식의 개념과 유사하다. 쇠락한 느낌이 들다 못해 다소 나쁘게 얘기하자면 마치 폐허 같다는 인상마저 주는 영화 속 림보 세계의 건물은 테크놀로지와는 도통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런 구식 건물이다(그래서인지 여기서 찍는 영화는 지금 사람들이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의 낡은 장비와 소품들만을 이용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쪽 세상에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훨씬 전부터 이미 1주일에 한번씩 망자들의 기억을 재연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대강 짐작해보자면, 그랬어야 이승 세계의 사람들이 저승 세계로 행복한 마음을 안고 무리없이 이동해 가는,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조화로운 우주가 오랜 세월 정상적으로 운용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멜로드라마로 건너뛴 후반부
그럼 이제 우리는 <원더풀 라이프>를 기억에 대한, 또 그것과 유비 혹은 상관 관계에 놓인 영화에 대한 명철하고 진지한 사색으로 읽어도 되는 것일까? 또다른 어떤 면에서(특히 또다시 크리스 마르케 식으로 말하면 기억의 ‘안감’(lining)으로서 망각에 대한 사고를 놓지 않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영화 속에서 망자들은 한 가지 기억을 선택하는 대신 그 나머지는 모두 망각해야 한다) 이 영화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원더풀 라이프>는 영화적 사색이라는 무거운 명칭이 좀 버거워 보이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사색의 농도가 영화 작품의 우열을 가리는 직접적인 바로미터가 되진 않지만, 하여튼).
앞서 본 기본 전제의 관점에서 기억과 영화의 본질을 파고들 것 같던 영화는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그것들에 대한 탐구를 손놓고 그만 멈춰서버린다. 이건 대략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영화가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이월해가면서 초점을 바꾼 구조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양한 기억(즉 삶)에 대한 풍경들을 향한 조심스런 관찰에서 감정의 진폭을 크게 하려는 멜로드라마로의 이월, 혹은 비행기에서 본 아름답던 구름,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는 가을날의 햇빛, 어머니의 무릎에 대한 비길 데 없이 부드러운 감촉 등과 같은 회고적 센티멘털리티로부터 실패로 끝난 3각 관계에 대한 회한이라는 더욱 감상적인 진폭을 가진 정서로의 이동.
<원더풀 라이프>는 일부분은 기억과 영화에 대한 성찰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또다른 면에서 볼 때는 일종의 성장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을 영영 떠나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더이상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인지 또 그런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성장담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문 부호를 찍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원더풀 라이프>는 죽은 사람들을 통해 거꾸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영화 속의 망자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좀비들이 아니라 사랑할 줄도 알고 질투할 줄도 알며 생각할 줄도 아는 극히 인간적인 존재들이다. 당연히 주인공 모치즈키를 비롯한 그들은 삶에서의 지혜를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들이다. 예컨대 모치즈키는 마침내 자신이 선택할 기억이 무엇인가를 알아내고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받아들이게 되고, 남몰래 그를 흠모해왔던 시오리는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둔다는 것을 배우게 되며, 디즈니랜드에서의 즐겁던 한때를 영원의 기억으로 가져갈 뻔하던 어린 소녀는 그것이 이미 수많은 또래 아이들이 선택했던 것임을 알고 자기에게 자기만의 다른 행복한 기억이 있음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 <원더풀 라이프>는 이런 휴머니즘적인 덕목을 강조하면서 또는 그것을 분산시킨다기보다 소수의 인물에게 집중시키면서 안타깝게도 철학자의 냉철한 시선을 탈색시켜가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원더풀 라이프>는 대략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원 구조로 구축되어 있는 영화다. 영화의 전반부는 막 림보에 발을 딛고 1주일 뒤면 그곳을 떠날 사람들을 비교적 다양하게 포착하더니 후반부로 가면서 점차 영화는 주인공 모치즈키의 심정에만 중점적으로 무게를 실어간다.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가진 이 이상한 판타지 영화는 전반부엔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들을 담아내는 비교적 객관적인 다큐멘터리인 척하더니 후반부로 가면 인물들을 향해 잦은 핸드헬드 카메라를 이용한 유동적인 시선으로 다가간다. 그럼으로써 처음에는 관찰자인 양하던 모치즈키(와 시오리)가 이 이야기의 명백한 ‘참여자’임을 노출한다. 결국 영화는 모치즈키의 입을 빌림으로써 그리고 다른 세계로의 입회를 결심하는 그의 선택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종국에 하고 싶어하던 말을 전달케 한다. 우리 자신이 타인의 행복한 기억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wonderful) 일인가를.
레네의 영화보다 <시네마 천국>에 가까운
<원더풀 라이프>의 감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마치 알랭 레네가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 안에서 기억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그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1998)을 비롯해 이 영화 <원더풀 라이프>, 그리고 그의 다큐멘터리 작품들이 고레에다를 그런 감독으로 불리게 해주었다.
하지만 <원더풀 라이프> 하나만을 두고 본다면 고레에다는 기억의 메커니즘을 이지적으로 탐구하는 알랭 레네와는 이종(異種)의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기억과 영화의 본질을 따져간다기보다 그 두 가지를 가지고 노스탤지어 내음 가득한 옛날 영화 같은 기억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원더풀 라이프>는 알랭 레네의 영화보다 오히려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 천국>(1988)과 같은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물론 <원더풀 라이프>는 <시네마 천국>처럼 애상적 감화력도 꽤 큰 편이라 영화를 보는 우리로 하여금 (모치즈키의 목소리에 감응하여) 문득 자신의 처지를 한번 되비춰보고 삶의 비밀 한 가지를 발견하게 해주기도 한다. 사실 그러면 <원더풀 라이프>는 분명 제 소임을 다한 것일 테다.
홍성남 I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