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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이 예술이 되려면
김혜리 2011-02-25

교 마치코의 <인어가 되고 싶어>.

2월5일

걸어다니며 만화를 보았다. 아니, 만화가 내게 걸어왔다고 할까? 길거리에서 만화책을 읽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올겨울 내내 열린 <망가> 전시회 이야기다. ‘망가 리얼리티’라는 부제대로 만화를 전혀 새로운 맥락과 스케일로 감상하도록 고안한 전시다. 관람객은 한 조각씩 잘린 그림칸이 줄지어 나붙은 벽을 따라 뱅뱅 돌기도 하고(구라모치 후사코, <역에서 5분>), 대형 캔버스를 광장삼아 한데 어우러진 캐릭터의 군상(마쓰모토 다이요, <넘버 파이브>)을 바라보며 프레스코 벽화 앞에서나 느낄 법한 경의를 품기도 한다. 교실을 축소 재현한 전시장에서 학원물의 모에 문화 수업을 듣고(와카키 다미키, <신만이 아는 세계>)나면, <>의 노란 펜더 기타와 <노다메 칸타빌레>의 피아노와 마주친다. 이를테면, 이것은 2.5차원의 세계다. 큐레이팅과 전시 디자인이란 원칙적으로 언제나 전시의 일부지만, <망가>와 같은 전시는, 실질적으로도 그렇다. 갤러리를 돌다보면 역으로, 평소 우리가 상당히 많은 암묵적 규칙에 따라 만화를 읽어왔음을 자각하게 된다.

3층의 첫 전시는 하얀 커튼으로 둘러쳐 있었다. 아, 양호실! 순간 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돼버렸다. 난로 위 놋쇠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던 증기, 칸막이 너머 여교사들의 나직한 도란거림, 열이 계속 올라 교실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바라던 간질간질한 마음.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코끝으로 훅 끼쳐온다.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쓰키를 휘감은 교실 창가의 커튼 자락도 저만치서 언뜻 펄럭인다. 이 방의 임자는 교 마치코(今日マチ子) 작가의 <센넨화보>(センネン画報). 10대 소녀와 소년의 생활감정을 일상의 기물(器物)과 더불어 그린 대사없는 한 페이지 만화들이 액자에 넣어져 촘촘히 걸려 있다. 작가의 블로그에 연재된 웹 만화인데 ‘전시’라는 미디엄과 전혀 위화감이 없다. 교 마치코의 만화에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전율의 최소 단위가 압축돼 있다. <센넨화보>는 분명 사춘기의 ‘화보’다. 그러나 흔히 불려나오는 분홍빛 감상뿐 아니라 청춘이라는 단어 뒤에 웅크려 있는 당황스러움과 비린내, 에로틱한 충동과 잔인한 기운을 사뿐 건져올린다. 교 마치코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들을 그린다. 소녀가 콘택트렌즈를 잊고 등교한 날 희부연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또렷한 한 소년의 모습, 소녀가 든 바늘귀에 한올의 실을 통과시키기 위해 집중한 소년, 시험이 끝난 날 강변의 바람에 나비처럼 훨훨 날려보내는 교과서의 포스트잇들. 나란히 잡은 지하철 손잡이는 우산의 그것이 되어 어린 연인들만의 동굴을 만들고, 우산은 다시 뒤집혀 우주로 신호를 타전하는 안테나가 된다.

한 페이지를 일곱컷 미만의 칸으로 구성한 <센넨화보>는 일본인들이 열일곱자로 쓰는 시 하이쿠와 닮았다. “가는 봄이여, 새 울고 물고기 눈에는 눈물이” 하는 식으로, 당연하고 순연한 사실을 그리되 새삼스럽게 표현한다. 거기엔, 단출하면서도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영원을 향해 열린 아름다움이 있다. 교 마치코는 2004년 7월부터 오늘까지 블로그( http://juicyfruit.exblog.jp/ )에 <센넨화보>를 거의 날마다 연재하고 있다. 이 작업 방식에 관해 교 마치코는 “‘꾸준한 노력은 훌륭한 것이다’라는 뜻에서 아니라, 뭔가가 쌓여가는 데에서 발생하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인터뷰했다. “좋은 작품도 나쁜 작품도 그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1천장을 그렸습니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그 의미를 이해한다.” 예민한, 혹은 예민함을 미학적 장점으로 평가받는 작가들은, 내 작업이 덧없고 무가치하지 않은가 하는 불안과 상시적으로 대치해야 하리라. 아이로니컬하게도 얇은 피부를 타고난 그들은 갑절로 용감하고 우직해야 하는 것이다.

2월7일

버지니아 울프는 33살에 요절한 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가 출간되자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썼다. 울프가 인용한 맨스필드의 일기 한 대목이 가련하다. “요통, 이건 정말로 이상한 것이네.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고통스럽다니. 노인에 대해 쓸 때 이 점을 기억해야지. 일어나기 위한 그 움찔한 시동, 멈춤, 분노의 표정, 그리고 한밤중에 누워서 마치 자물쇠로 잠겨 있는 듯한 느낌.” 위안을 찾는다면, 둔감함도 끔찍할 수 있다는 사실 정도일까? 일찍이 이를 잘 아는 권력기관은 고문하고 처벌하고 세뇌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간을 어둡고 좁은 곳에 격리 수용해 감각을 마비시키는 수단을 썼다.

영화도 마음만 먹으면 꽤 심리적으로 섬세할 수 있는 장르다. 다만 내러티브 영화가 스스로 묘사하려는 감정의 무게를 지나치게 무겁게 평가할 때 약간의 부작용이 발생한다. 웬만큼 잘 쓴 대화보다 모호한 침묵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인데, 이런 영화에서 인물들은 대화는 제 자신하고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누고 타인에게는 결론만 격앙된 어조로 외치곤 한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는 가장 조악한 표출의 쉬운 예다. 예술영화 카테고리로 묶이는 영화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 현상은 할리우드적 연기, 주류 멜로드라마의 독소를 해독하겠다는 선한 의지를 창의성이 따라가지 못함으로써 초래되는 부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2월9일

뒤늦게 톰 포드의 영화 <싱글맨>과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원작 소설을 보다. 사별한 애인의 빈자리에 고통을 겪는 50대 게이 남성의 이야기다. <디 아워스>에서 절망으로 인해 죽기를 결심한 줄리언 무어가 <싱글맨>에서는 비슷한 하루를 보내는 콜린 퍼스의 친구로 나온다. 두 영화의 성정은 닮았지만 재현의 스타일은 다르다. 1960년대풍이라기보다 1960년풍으로 찍은 2000년대 패션 카탈로그처럼 보이는 <싱글맨>의 세계에 원작 소설의 “좁은 주방의 작은 식탁” 따위는 없다. 예민한 미감의 디자이너/감독이 원작을 ‘메이크 오버’했다는 평이 나왔다 해도 반박하기 어려웠겠다. 그럼에도 <싱글맨>이 영화로서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자기애가 강한 유미주의자가 갖게 마련인 강퍅한 마음- 비탄 중에도 미모에 반응하는 장년의 성욕, 이웃을 향한 생리적인 혐오- 을 위장하지 않아서다.

예쁜 영화를 찍고자 할 때, 예쁜 것만 보여주는 건 하수(下手)의 길이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추하고 부끄럽다고 여기는 것들이 느닷없이 드러내는 넓은 범주의 미(美)가 섞여 있어야 한다. 예쁜 것은 몽롱하게 하지만 미운 것들은 사위를 고요하게 만들고 의식을 명료하게 깨워 우리의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다.

2월10일

1964년 출간된 <싱글맨>의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주인공 조지의 입을 빌려 마이너리티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요컨대 다수에게 위협이 못 된다면, 소수집단조차 되지 못한다는 지론이다. 조지는 “보호자인 척하는 관용보다 소수집단을 좋아하지 않거나 미워한다고 인정하는 편이 낫다. 솔직해지면 안전밸브가 생기고, 밸브가 있으면 박해를 덜하게 된다”는 입장이다. 이 논리를 확장하면 소수자의 커밍아웃은 필요하며 적어도 권장해야 할 일이다. 한편 2010년 말 배우 케빈 스페이시는 성 정체성을 묻는 <데일리 비스트>의 게이 인터뷰어에게 직답을 거부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한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는 데에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모두의 이유를 같은 상자에 넣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선(프라이버시)을 넘지 않았고 앞으로도 넘지 않을 것이다.” 덧붙여 그는 성 정체성을 공표하지 않는다고 거짓된 삶을 산다고 생각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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