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램펄린 위에서 하늘을 향해 뛰어오를 때 기분, 기억하시는지. 발을 구르고 몸이 솟구치는 순간, 마치 총알처럼 몸이 멀리 튕겨져나갈 듯 제어 불능의 희열과 동시에 인정사정없이 땅을 향해 온몸이 처박힐 듯한 추락의 공포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아저씨들이 동네마다 끌고 다니며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받고 태워주던 트램펄린의 주고객은 중력이 뭔지 모르는 연령대이게 마련이라 아이들은 쉼없이 그 위에서 방방 뛰며 좋아 죽겠다는 비명을 질러대곤 했다(<거침없이 하이킥!>의 이순재가 무아지경으로 타고 놀던 트램펄린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뭔지 모르겠지만 좋아 죽겠어….’ 그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을 만큼. 가능한 한 오래, 가능하면 영원히.
윤이형의 두 번째 소설집 <큰 늑대 파랑>의 첫 이야기 <스카이워커>의 주인공은 핵전쟁 이후의 세상에 살고 있다. 그곳에서 트램펄린은 스포츠이면서 종교의식으로, 그 인기가 하향세에 있다고 한다. 주인공 지현은 꽤 인정받는 트램펄린 선수인데 문제는 트램펄린 대회의 엄격한 규정을 그녀가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컨데 경기 내내 웃어서는 안된다. 신에게 바치는 엄숙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들’을 알게 된다. 경기장 바닥뿐 아니라 천장에도 트램펄린을 설치하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중력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들. 벽 너머의 존재들.
<스카이워커>뿐이 아니고, 이 책에 실린 단편들만이 아니고, 윤이형의 소설에서는 상상력이 거의 항상 이야기의 무대가 된다. 1996년 시위대의 꼬리가 되었다가 이내 <저수지의 개들>의 관객이 되었던 세 여자와 한 남자가 그림그리고 파랑이라고 이름붙인 늑대가 십년이 지나 어머니들과 아버지를 찾아온다는 표제작 <큰 늑대 파랑>이나 문장을 길고 매끄럽고 풍부하게 바꾸어주는 노트북의 프로그램을 손에 넣게 된 글쓰는 두 친구의 이야기 <로즈 가든 라이팅 머신>도 그렇다. <완전한 항해>에서는 죽은 자의 기억을 흡수해 능력과 경험을 향상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야기의 구체적 구성요소는 현실적이고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세계는 환상적인데, 그 안의 등장인물들이 밖을 쳐다보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강도는 일견 이상적으로 보이는 환상의 세계에서조차 강렬하다. 시스템과 싸우고 싶지만 매번 무력함을 절감하게 되고, 아름다움을 끌어안고 싶지만 내 안에 그 자리가 없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이 단편집의 많은 이야기들은 기묘한 해피엔딩을 맞곤 한다. 마치 트램펄린 위에서 무한 점핑을 하는 기분이다. 뛰어오르면, 떨어진다. 그래서 시시한가? 다시 뛰어오르면 된다. 다시, 또다시. 가능한 게 그것뿐이라면, 즐기는 게 이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