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겨, 일에 밀려 지내다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가 생긴다. 생각을 추스려야지, 간혹 마음을 먹어도 일은 쓰나미처럼 쏟아지고 시간은 팽팽 돌아가니 ‘표류인생’은 계속된다. 휴식은 그래서 필요하다. 1년에 두번 나오는 합본호는 방향 모르고 전진만 하던 주간지에 숨통을 틔워준다. 일주일 동안의 꿈같은 휴가를 맞아 <씨네21> 사람들은 멀리 여행을 가거나 평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책, 드라마 등 시리즈를 정복하거나 아예 쉼없는 휴식을 취한다. 물론 이 휴식의 시간 동안 불가피하게 일을 해야 하는 불운한 희생자들도 발생하지만(이번에도 여러 명이 설 연휴에 일을 하게 생겼다).
개인적으로도 휴식이 절실하다. 편집장이라는 자리를 맡은 게 이번호로 딱 1년이 된다. 별 계획없이 갑자기 일을 맡아 우왕좌왕 한해를 보냈는데 언젠가부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잡지가 어디를 향하는지 헤매는 느낌이 들었다. 홍상수 에디션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 특집처럼 나름 재미있는 시도도 했지만, 아직은 미숙한 역량을 절감하고 있다. 뭐 일주일을 쉬고 나면 갑자기 의욕이 충천하고 아이디어가 샘솟는 건 아니겠지만 지난 1년을 찬찬히 돌아보는 여유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이 그것을 계획하는 데서 나오듯, 휴식의 진짜 기쁨도 뭘 할지를 상상하는 데서 나온다. 합본호 휴가 전후로 잡아놓은 플랜은 원대하다. 1. 마눌님이 계신 미국으로 가서 약간의 여행을 한다. 2. 여행을 하는 동안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1, 2권과 <괴짜경제학> <슈퍼 괴짜경제학> <진보집권플랜>, 그리고 미드 <보드워크 엠파이어>의 원작을 읽는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산업화된 식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책을 찾아본다. 3.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를 찾는다. 4. 아이패드로 해외 잡지 동향을 파악하고 지면개편을 준비한다. 5. 청탁받은 책 원고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6.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영화계 인사들과 회동을 갖는다.
막상 계획을 짜고 나니 방학 직전 선생님에게 제출했던 방학 계획표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동그라미를 쪼개서 ‘공부’, ‘곤충채집’, ‘독서’, ‘또 공부’ 같은 항목을 집어넣다보면 수면 시간이 4시간밖에 남지 않아 고민했던 기억. 이토록 허무맹랑해도 계획 짜기는 즐겁다. 이번에 다 이루지 못하면 다음에 하면 되지. 다음에도 못하면 그 다음에 하면 되고 정 안되면 죽기 전까지 하면 되지, 하는 자세로 이것저것 쑤셔넣다 보면 이미 그것을 다 이룬 듯한 묘한 쾌감이 찾아온다.
이번 설 연휴를 맞아 여러분께도 말도 안되는, 무리한 계획 수립을 추천한다. 연휴 마지막날 밤 크게 자책만 하지 않는다면 괴이한 성취감을 전해줄 테니까. 아, 대신 1번 항목으로 ‘<씨네21> 설 합본호 읽기’를 꼭 넣어주셨으면 한다.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