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것> White Material(2009)
감독 클레르 드니 상영시간 106분 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 / 음성포맷 DTS HD 5.1, 2.0 프랑스어 / 자막 영어 / 출시사 아티피셜아이(영국) 화질 ★★★★☆ 음질 ★★★★ 부록 ★★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나 10대 시절까지 지냈다. 작품의 원점을 인도차이나에 두는 그녀는 <말의 색채>에서 “나는 식민지 전체다. 모든 식민지의 쓰레기통이 바로 나다.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대해 썼다”라고 밝혔다. 솔직하면서도 워낙 포괄적인 표현이어서 (그녀의 작품처럼) 단번에 이해하기란 어려우나 식민지의 삶이 그녀에게 남긴 인상을 읽을 수 있다. 작품 속에 상실감, 죄의식, 거칠고 자유로운 영혼 등이 풍부히 투영된 만큼, 뒤라스의 소설을 다른 사람이 영화화할 경우 실패로 이어지곤 한다. 2008년, 그녀의 대표작 <태평양의 방파제>가 영화화됐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세명의 프랑스인 가족과 부유한 아시아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얼핏 <연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영화 <더 씨 월>(영화제의 조악한 한글 제목 붙이기에 경악한다)은 식민지 관리국의 무책임한 행정과 바닷가의 열악한 땅 사이에서 지주의 꿈을 버리지 않는 여성에 집중한다. 캄포디아 출신의 리티 판이 메가폰을 잡았고, 여기에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아 기대를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씨 월>은 이야기만 따라다니는 서사극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감독의 명성을 믿었던 위페르는 쓴맛을 삼켜야 했다.
2009년, 위페르는 식민지에서 농장을 지키려 애쓰는 여성을 다시 연기하게 된다. <백인의 것>을 연출한 클레르 드니는 (관리였던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령 식민지를 전전하며 유년을 보낸 인물이다. 뒤라스가 그랬듯 식민지의 삶을 가슴속에 간직한 드니는 그 기억을 불러내 장편 데뷔작 <쇼콜라>를 만든 바 있다. <쇼콜라>는 <백인의 것>의 시작점이다(비록 드니는 두 영화의 비교를 거부했지만 말이다). <쇼콜라>는 프랑스란 이름의 여성이 아프리카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아프리카에서 겪은 어린 시절을 더듬다 옛집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여주며 끝나는 영화에는 이후 이야기가 생략돼 있다. <백인의 것>은 ‘만약 그녀가 아프리카에 계속 남았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전개되는 작품 같다. <쇼콜라>에서 추억의 공간이자 평화로운 자연을 간직한 아프리카는 <백인의 것>에 이르러 위험한 땅으로 바뀌어 있으며, 백인 여주인공은 생사의 문제에 직면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인 이삭 드 반콜이 두 영화를 연결하기도 한다. <쇼콜라>에서 백인의 집안일을 도맡으면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는 아프리카인을 연기한 그는 신화적인 반군 지도자로 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한다.
<백인의 것>은 내전에 휩싸인 가상의 국가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더러운 백인들이 우리를 멸시했어. 저희들 때문에 목숨을 걸었는데, 사실 그들은 허세에 넘치고 오만하고 무지막지한 놈들이야. 놈들에게 이 아름다운 땅은 아까워. 고마워할 줄도 모르잖아”라는 내레이션이 나오고, 드니의 영화가 정치적인 지점에 들어선 건 분명해 보이나, 그녀는 아프리카의 혁명적 기운, 신식민주의 같은 논제에 대해 자신의 노선을 밝히려 들진 않는다. 추악하고 폭력적인 식민주의의 우산 아래 백인이라는 지위를 부린 사람으로서 그녀는 아프리카란 땅에 무언가를 주장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변혁의 광풍 속에서 변화를 부정하고 과거의 지위를 고수하려는 백인 여성을 내세운 드니는 과연 무엇이 벌어질지 바라볼 뿐이다. 드니는 <백인의 것>을 ‘두려움을 모르는 어린 악동들’에게 바쳤다. 한때 영감을 주었던 땅에서 벌어진 가혹하고 끝없는 내란으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갔다. 기실 그녀가 내내 염려한 건 바로 그들이며, <백인의 것>은 그 마음을 담은 영화다. 영국판 블루레이는 부록으로 인터뷰(10분)를 수록했는데, 필자의 플레이어에선 재생이 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