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제 정말 은퇴해야 하나 싶은데 넥스트가 안 보여.”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제작자 J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쪼들리는 제작사의 살림을 꾸리느라, 투자자와 승강이를 벌이느라, 시나리오 개발하느라 지쳐빠졌다는 그는 자신도 자신이지만 한국영화계의 미래가 걱정이라고 했다. “새로운 프로듀서들이 자꾸 나타나서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줘야 하는데 부진한 것 같아. 그런 친구들이 나타나면 그동안 익힌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홀연히 떠날 텐데.”
그의 말마따나 최근 들어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직군은 프로듀서다. 한국영화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데는 프로듀서들의 공헌이 막대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던 신철, 강우석, 차승재, 심재명, 오정완 등 ‘신세대’ 프로듀서들은 새로운 투자원과 새로운 감성의 감독들을 끌어들였고 젊은 관객의 취향에 맞는 다양한 기획을 보여줌으로써 ‘한국영화 신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투자-배급-상영의 수직구조를 갖춘 대기업들이 영화계를 지배하고 감독들이 스스로 제작하거나 대기업과 ‘직거래’하기 시작하면서 프로듀서들의 입지는 지극히 좁아졌다.
영화 제작에 있어 프로듀서의 중요성을 새삼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들만 돌아봐도 대기업 투자작은 지나친 ‘안전빵’ 노선을 택하고 있으며 일부 감독이 주도한 영화는 대책없는 과욕을 드러내고 있다. 작품 전체를 통찰하면서도 적절한 도전정신과 적절한 상업적 안정성을 추구해줄 능력있는 프로듀서들의 부재가 아쉬운 대목이다.
프로듀서들이 이런 현실에 처하게 된 데는 그들 자신의 책임도 있다. 방만한 기획, 허술한 제작관리 등으로 투자쪽의 신뢰를 잃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듀서의 존재 이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산업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독들의 ‘자발적’인 창의성에만 기대선 안된다. 건강한 프로듀서군이 새로운 발상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뿜어낼 때 진정한 산업적 안정성도 구축하게 될 것이다.
이번 특집기사를 통해 ‘차세대 프로듀서 10인’을 소개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이전 세대와 다른 상상력과 방법론으로 영화를 만들어나가려는 이들의 노력을 북돋우기 위해서다. 물론 그 누구도 아직 대단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변화된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영화계의 귀한 인물들이라 하겠다. 비록 전 세대와 달리 멋진 인테리어를 갖춘 사무실도 없고, 투자사로부터 받은 넉넉한 기획개발비도 없으며, 우회상장 제안도 받지 못하지만 영화의 초심이라는 비장의 무기를 지니고 있기에 이들의 미래는 환할 게 틀림없다. 차세대 프로듀서들에게 박수를!
P.S. 아 그리고 J 대표님, 아무리 차세대 프로듀서들이 자리를 잡더라도 은퇴한다고 말하진 마세요. 여전히 연륜과 경험은 중요한 거니까요. 신인, 중견, 노장 프로듀서들이 멋지게 경쟁하는 충무로가 보고 싶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