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사체를 포르말린 용액에 담가놓은 다미엔 허스트의 수족관. 인분과 같은 신체재료로 만든 길버트&조지의 작품. 토사물과 지렁이와 곰팡이를 찍은 신디 셔먼의 사진. 무정형의 점액질로 뒤덮인 매튜 바니의 설치. 이처럼 부패하는 사체를 묘사하거나, 인간의 배설물을 동원하거나, 형체가 없는 점액질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의 구토를 유발하는 작품을 ‘역겨운 예술’(abject art)이라 부른다. 아주 어린 아기들은 종종 더러운 줄도 모르고 제 똥을 손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곤 한다. 예술도 그처럼 시간을 거슬러 유아기로 퇴행해버린 것일까?
구토와 취미
구토를 유발하는 예술이란 어떤 의미에선 형용모순이다. 예술은 흔히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슐레겔은 샤를 바퇴의 <하나의 원리로 환원되는 아름다운 예술>의 번역본(1751)에 이런 각주를 붙였다. “모방을 통해 본성이 변형되는 불쾌한 감정들 중에서 오직 역겨움(Ekel)만이 예외다. 여기서는 예술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로 끝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체는 역겨워도 사체의 그림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지만, 슐레겔은 역겨운 것을 아예 미학적 한계 현상으로 만들어 예술의 밖으로 추방한다. 중세만 해도 시체의 묘사는 보편적이었다. 당시 교회나 수도원의 벽은 종종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로 장식되곤 했다. 썩어가는 시체들의 묘사는 물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종교적 메시지와 관련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에 들어와 이 그림들은 철거되거나 덧칠되어 공공의 영역에서 소리없이 사라진다는 점. 하긴 사라진 게 어디 그뿐인가? 중세의 카니발에서 공공연히 행해지던 스캐톨로지(scatology), 즉 분뇨를 뿌리며 고상함을 조롱하던 문화도 근대에 들어와 모습을 감춘다. 왜 그랬을까?
노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문명화과정’은 곧 해부학적인 것, 생리학적인 것을 억압하는 과정이다. 가령 중세엔 동물 사체가 통째로 식탁에 올라왔으나, 근대 궁정의 식탁에 오르는 요리는 사체임을 알아보기 힘들다. 중세의 전사들이 식탁에서 스스럼없이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고, 침을 뱉었다면 궁정의 귀족들은 생리현상의 표출을 역겹게 느꼈다. 엘리아스의 말대로 근대의 예술문화가 프랑스 궁정에서 발달한 이 세련된 예법과 섬세한 취미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역겨운 것이 근대예술에서 터부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진리의 계시로서 구토
18세기 이후 역겨움을 바라보는 시각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가령 칸트는 ‘역겨움’에 모종의 인식기능을 부여한다. 즉 역겨움이란, 신체 안으로 섭취할 경우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을, 이성의 판단에 앞서 즉각적으로 알려주고 구토라는 격렬한 신체적 반응을 통해 물리치게 해준다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논리를 ‘정신적 양식’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한다. 이로써 역겨움은 생리적 방어기제의 수준을 넘어서 이성마저 능가하는 능력, 즉 정신의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즉각적으로 물리치게 해주는 판단력이 된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와 플라톤은 “현세를 더 잘 모독하기 위해 내세를 발명했다”. 니체는 삶을 역겨워한 이 도덕의 설교자와 미덕의 이론가를 다시 역겨워한다. 이 메타 역겨움을 통해 그는 예수와 플라톤이 부정한 삶을 다시 긍정한다. 이렇게 초인은 역겨움으로 역겨움을 극복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진리가 신체를 통해 주어진다는 점. 세속적 계시라 할까? 구토라는 ‘신체’의 반응을 통해 그 어떤 ‘정신’의 활동보다 더 높은 진리가 발생한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소설(<구토>)도 이와 같은 모티브 위에 서 있다.
이 시기에 예술에서도 가치전도가 일어난다.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주의 예술의 무한한 반복에 지루함을 느꼈다. 예술이 더이상 감흥을 주지 못하자, ‘아름다운 것’보다는 이제 ‘자극적인 것’(piquant), ‘강력한 것’(frappant), ‘충격적인 것’(choquant)이 중요해지게 마련.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때 밖으로 쫓겨났던 ‘역겨움’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 가령 연인의 모습을 썩어가는 사체로 묘사한 보들레르를 생각해보라. ‘아름다운 구토’? 이렇게 구토의 대상을 외려 ‘향유의 대상’으로 바꿔놓은 데에는 어딘가 병적인 구석이 있다.
주체도, 객체도 아닌 것
그 병리학의 분석은 정신분석학에 맡기는 게 좋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도 한때는 땅에 코를 박고 살았다. 땅에서 나는 냄새들은 (정보의 원천으로서) 향유의 대상이었으나, 직립보행으로 후각의 역할이 언어로 교체되면서, 그 냄새들은 (쓸모없는 자극으로서) 외려 역겨움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아무리 문명화되어도 인간 안에는 여전히 네발 동물이 들어 있다. 이놈이 우리에게 역겨움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 욕망을 억압할 때 ‘신경증’이 발생하고, 거기에 탐닉할 때 ‘도착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재치있는 언어유희를 동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겨운 것’(abject)은 ‘주체’(subject)도, ‘객체’(object)도 아니다. 그것은 태아-산모가 분리되지 않은 모태(chora)로서 여성의 신체다. 아이가 주체가 되려면 바로 그 신체로부터 분리돼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태아를 보호하나, 동시에 그를 위협할 수도 있는 존재. 이를 ‘어머니의 권위’(authorit? maternelle)라 부른다. 아이가 주체로 독립하려면 아버지의 권위가 지배하는 상상계에 성공적으로 입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다시 ‘어머니의 권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체도 프로이트가 말한 “네발 동물” 못지않게 집요하다. 아이가 독립된 주체가 된 뒤에도 ‘어머니의 권위’는 어머니의 신체로 회귀하려는 욕망, 즉 태아가 어머니의 신체 안에서 느끼던 쾌락(jouissance)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으로 작용한다. 자궁 속 태아는 아직 존재도 아니지만 이미 비존재도 아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신체로 회귀하려는 욕망은 태아-산모의 결합체처럼 존재/비존재의 구별이 없는 것, 즉 생명/사물의 구별이 사라진 사체나 형성 이전의 무정형한(informel) 재료에 대한 선호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술과 역겨움
프랑스의 역겨움(‘abjection’)은 이렇게 독일어(‘Ekel’)로는 불가능한 언어놀이를 허용한다. 즉 어머니의 신체는 주체나 객체가 아닌 비체(abject)이기에, 그리로 회귀하려는 욕망이 역겨움(abject)에 대한 선호로 나타난다. 프로이트가 신경증이나 도착증의 원인을 아버지의 권위에서 찾는다면, 크리스테바는 그것들이 어머니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남성주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여성주의적 대안인 셈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공유하는 시각이 있다. 즉 예술이 이 역겨움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문명화한 인간에게도 역겨운 것에 대한 은밀한 소망이 남아 있으나, 사회는 역겨움의 향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때 그 금지된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우회적으로 실현하는 길을 제시해주는 게 예술이라는 것이다. 예술이 ‘리비도의 승화’라는 일반론의 변주라 할까? 이제 현대예술에 ‘역겨운 예술’이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있을 거다. 물론 프로이트나 크리스테바가 모든 ‘역겨운 예술’에 조건없이 찬동을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은 그것들이 충분히 승화되지 않았다고 느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