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전영객잔
[전영객잔] 가혹하고도 가혹하구나

정성일의 <카페 느와르>에서 영화평론가 남다은이 읽어낸 것들

스포일러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은 <씨네21>785호를 참고하시길.

<카페 느와르>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하 <베르테르>)을 원작으로 한 1부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를 바탕으로 삼은 2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그런데 이 설명은 뭔가 미진하거나 엄밀히 말해 틀렸다. 내용적으로는 두 소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게 맞지만 구조적으로 이들이 1, 2부로, 순차적으로 나뉜다고 볼 수 없다. 꼬투리를 잡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은 중요한 문제다.

우선 <카페 느와르>의 전체 구조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큰 덩어리들로 생각보다 단단하게 묶여 있는 구조는 이 영화를 들여다보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1, 2부의 앞과 뒤에 더해진 이야기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불러도 된다면, 그 각각의 자리에는 두 문학작품과 관계없는 현실의 소녀가 등장한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 소녀(정인선)는 프롤로그에서는 어떤 사연에서인지 햄버거를 목구멍으로 밀어넣고 있고(정성일은 그것이 자살기도라고 알려주었다), 에필로그에서는 임신한 상태로 다시 등장해서 삶을 다짐한다. 그 사이에 자리잡은 <베르테르>와 <백야>는 1, 2부로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 <베르테르>의 죽음 ‘안’에 <백야>가 위치한 상태로 존재한다. 달리 말해 유부녀를 사랑한 영수(신하균)의 첫 번째 죽음 뒤 <백야>의 세계가 펼쳐지고 다시 그의 죽음으로 돌아온다. 혹은 그는 다시 죽는다. 어쨌든 두 번째 죽음.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에서 나스첸카를 사랑한 남자는 끝내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해도 죽지 않았다. 영수의 두 번째 죽음이 (나는) 정성일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성일은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괴테의 선택이라고 말한 바 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그러니까 <카페 느와르>의 구조를 좀 쉽게 도식화한다면 햄버거를 먹는 소녀-베르테르-백야-베르테르-임신한 소녀, 쯤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어체 대사, 문자의 새로운 전달 양식

관객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이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소녀를 ‘위한’ 이야기다. 나는 소녀‘의’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았다. 영화의 시작에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던 소녀가 끝에 이르러 임신한 몸을 끌어안고 “나는 매일같이 아침이 오길 기다릴 거야”라고 말하기까지, 그 사이에 어떤 시간과 어떤 세계가 그녀를 지나갔을까. 영수가 강으로 뛰어내리던 배에 소녀가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 우리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녀의 변화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그저 일종의 첨언처럼 생각한다면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 양쪽 끝에 영화의 무게를 온전히 싣는다면, 영수의 이야기, 혹은 미연들이나 선화의 이야기는 결국 소녀를 가로지르는, 어떤 식으로든 그녀를 위한 이야기가 된다. 즉 영화의 몸통은 소녀가 스스로를 죽음에서 어떻게 견디어내는가에 대한 지극히 영화적인 고찰이고, 정성일은 그 질문의 자리에 이 시대에 자신의 영화가 어떻게 스스로를 버틸 수 있는지라는 물음을 겹쳐두는 것 같다. 그때, 그가 손을 뻗은 것은 용감하게도 문학이다. 말하자면 다른 어떤 영화 장르에도 앞선, 영화라는 시간이 포괄할 수 없는 문학(이라는 거대한 역사).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베르테르>와 <백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여러 차례 밝혔다.(722, 785호의 인터뷰) 몇 세기 전 서구의 시대정신, 그의 말대로라면 “혁명 전의 가능성과 후의 가능성”이 21세기 남한사회 안으로 불러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영화적 필연성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가 이에 답할 위치에 있지 않다. 혹은 그 논의는 영화 밖으로 너무 나갈 것이다. 다만 <카페 느와르>가 문학을 참조한 영화라고 할 때, 영화를 본 누구나 다 한번씩 꺼내는 영화 속 인물들의 문어체 대사에 대해서라면 조금은 할 말이 있다.

단순히 인물들이 책의 대사를 그대로 암송해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책을 보듯 읽어야 하는 하얀 화면의 글귀들, 편지를 읽듯 거기 덧입혀지는 배우들의 또 다른 목소리 때문에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 영화를 문학적인 영화, 심하게는 문학의 영상화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하지만 문학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 이를테면 대사나 내용 같은 영화의 표면이 문학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언가에 ‘문학적’이라는 수사를 붙일 충분한 이유가 될까. 게다가 이 영화가 문학적이라는 말은 얼마간 이 영화가 현학적이거나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문법이 아니라는 의미로 쓰일 따름이어서 여기에는 양쪽 모두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범주화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다. 문어체 대사에 대한 지적에 아주 간단하게, 문자가 배우의 육신을 통과하는 걸 보고 싶었다고 반복해서 말할 뿐인 정성일의 언급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그는 문자의 내용 전달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자가 인간과 세상을 통과할 때, 혹은 세상이라는 영화의 하얀 스크린과 빛을 통과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의 내레이션까지도 외워야 했다고 고충을 털어놓던 배우 김혜나의 말을 기억하면, 정성일은 책이 영상에 찍혔을 때의 형상이 아니라, 책이 영상을 통과하며 바로 그 시간의 공기로 움직일 때의 기운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결국 무엇에 대한 열망일까. 문득 떠오르는 건 고다르의 말이다. 고다르는 <필름 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매체의 문법의 순수한 긍정을 보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시작이다. 문학에서는 문장과 문법이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가능하지 않고, 오직 영화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 적 있다. <카페 느와르>에서 문학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도 영화를 통과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영화와 문학 각각의 메커니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서로에게 작동하고 있고, 중요한 건 그런 과정 속에서도 동시대성을 붙잡고 추상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하여 무엇보다 문학이 아닌 ‘영화’가 되기 위해, 영화가 자신의 몸을 서울이라는 장소성에 밀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장소들은 <카페 느와르>에서 상징적인 만큼 가장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무엇이다. 남산타워와 청계천. 말하자면 서울의 수직선과 수평선.

죽음을 망각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

다시 이 영화의 구조에 대한 물음으로 돌아가야겠다. 사실 나는 이 영화가 <베르테르>와 <백야>를 끌어온 이유보다, <백야>에서 끝내지 않고 기어이 다시 <베르테르>의 죽음으로 돌아온 이유가 궁금하다. 즉 영수의 두 번째 죽음의 필연성에 대한 질문.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이것이 위대한 작가 괴테의 선택이라는 정성일의 말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어야 할까. 그렇다면 반대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정성일은 괴테의 선택을 부수지 않는가. 감독은 왜 한번의 죽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걸까. 영수를 다시 죽이는 건, 결국 감독 자신이다. 그는 수차례 자신은 그 죽음을 도스토예프스키의 힘을 빌려 단지, 최선을 다해 미룰 수밖에 없다고 밝혔는데, 그 미뤄진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 영화에서 봐야 할 거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백야>의 세계에서 영수가 또다시 사랑에 실패하고 절망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될 때, 결과적으로 그 미뤄진 시간은 영수를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카페 느와르>의 ‘백야’는 무엇을 위해 사흘 밤 동안 거기서 되살아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의 두 번째 죽음이란 실연한 남자의 상투적인 죽음, 이미 한차례 행해진 그 죽음이 아니라면, 이제 무엇의 죽음일까.

영화 속 ‘백야’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기 전에 영수의 첫 번째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가 사랑에 실패한 ‘베르테르’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전제를 잠시 거둬보자. 그는 왜 죽는가? 내 생각에 영화는 그 답을 이미 명징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영수가 죽는 이유는, 아니 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폭력적인 아버지의 잠재성을 내재한 무력한 아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반부에 포진한 동시대 한국영화들, <올드보이> <숨> <괴물> 등의 인용은 정확히 말하면 이들 영화 속 남자들과 그들이 만든 세계에 대한 인용이며, 폭력의 담지자들이거나 체념과 냉소에 빠져든 그들과 영수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영수의 죽음은 어쩌면 그런 남자들의 전형 혹은 육신에 대한 <카페 느와르>의 환멸의 표출, 단죄, 혹은 그들을 다루는 유일한 해결책인지 모른다. 아버지가 죽어버리길 기다리는 정윤은 자신의 생일파티에 망치를 들고 찾아와 아버지와 대면한 영수에게 귓속말로, “저는 빨리 어른이 돼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내게 그 말은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간절한 부탁으로 들린다. 그러나 영수는 그 커다란 망치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가 “이제 코미디는 모두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집을 나올 때, 여기에는 오직 자포자기의 심정만 어른거린다. 그 코미디는 온전히 영수 자신의 것이다.

그러니 묻고 싶다. <카페 느와르>가 우리는 죽음에 저항하고 살아야만 한다고 호소할 때, 그 외침은 과연 세상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외침일까. 위험한 발언일 수도 있지만,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는 끈질기게도 죽지 않는, 죽음을 망각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안고 있다. 그들은 너무 강력하다. 나는 영수가 미연의 남편 앞에서 망치를 꺼내드는 그 순간에 영화의 조롱이 담겨 있다면, 그건 <올드보이>의 특정 장면 혹은 오대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는 영수를 향해 있다고 느낀다. 만약 그가 가여운 정윤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면, 그가 그 ‘아버지’와의 단절을 스스로 성취했다면, 그에게는 죽음이 아닌 다른 선택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한강에 뛰어들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도 그의 미래는 기껏해야 이후 ‘백야’에 등장하는 무기력한 예언자의 모습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수와 함께 말해야 하는 인물은 또 다른 미연(김혜나)의 존재다. 그녀는 시종일관 영화의 어느 지점에도 붙지 못하고 떠도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녀와 영수가 언젠가 사랑했던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마치 단 한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의 상실을 슬퍼하는 여인처럼 보인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빨간 풍선을 쥐고 있는 이 아름다운 여인은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불륜 현장을 폭로하는 편지를 보내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가장 이상하게 등장하는 신은 홍상수의 <극장전>과 함께이다. 다른 한국영화들의 인용과 달리 <극장전>은 다른 배우들에 의해 흉내내어지는 게 아니라, 영화의 장면 전체가 그대로 삽입된다. 하나는 <극장전>의 여관 앞에서 신발 끈을 고쳐 묶는 여자가 나온 장면을 보면서 미연과 영수가 오럴섹스를 하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이후 미연이 홀로 <극장전>의 엔딩, 김상경이 “생각을 더 해야 해”라고 말하는 그 장면을 보며 울면서 자위하는 모습이다. <극장전>의 특정 장면, 그리고 그걸 보며 하는 섹스, 이때 DVD방의 어둠 속에 웅크린 이들의 몸 위로 빛처럼 새겨지는 그 장면들의 형상의 조합은 어딘지 그로테스크하다. 이 장면들 각각 이전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 영수에 대한 미연의 비틀린 사랑이, 이후에는 다른 미연(문정희)과의 사랑을 선언하는 영수의 글귀가 따라온다. 말하자면 <극장전>의 이 특정한 장면들의 삽입은 <카페 느와르>에서 사랑하면 안될 이를 사랑하는 자들의 몸부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카페 느와르>의 이 장면들을 대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이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극장전> 속 위의 특정 장면들에 대한 정성일의 평에 기대려고 한다. 그는 그 두 장면이 결국은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도록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성일에게 <극장전>은 죽음을 말한 다음, 죽음 대신 존재를 선택하고 있으며,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행위를 중단하기로 결심하는 “희극적 냉소”의 영화다(<씨네21> 507호). 그런데 <카페 느와르>의 두 인물이 <극장전>을 보며 그런 행위를 할 때에는 좀 다른 의미가 생기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랑의 포기가 죽음에 이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고 여긴다. 더욱이 미연은 살기 위해 사랑을 중단하는 대신, 사랑을 실패시켜 지연시킴으로써(자신이 사랑하는 영수의 사랑을 실패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연장시킴으로써)만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단이 아닌 실패. 쾌락을 포기함으로써 고통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끝내 놓지 않음으로써 고통도 안고 가는 것. 적어도 영화의 이 지점에서는 그렇다. 이는 홍상수의 인물들이 내린 그 결단에 비해 존재의 긍정에 더 가깝나? 혹은 더 비관적인가? 혹은 어떤 식으로든 더 나아간 것인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미연과 영수는 <극장전>의 인물들에 비해 사랑과 삶에 대해 더 근본적이고 순정적인 것 같고 그래서 그만큼 더 위악적인 느낌을 주며, 그 위악을 보는 것이 때때로 힘겹다.

이 영화의 경이로운 순간들

마침내 영수가 한강에 뛰어든 다음, 젖은 채로 살아나와 청계천을 거니는 ‘백야’의 세계를 말해야 할 차례다. 만약 이 영화를 ‘장소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말의 의미를 온전히 감당하는 장면들이 이 죽음과 죽음 사이의 세계에 있다. 흑백으로 찍혔다고 해서 이 세계를 죽음으로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이 영화에서 무언가 벌어지고 있고, 진행되거나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는 이의 몸으로 전달해주는 순간이 여기 있다. 무엇보다 세 지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흑백인 이 세계는 선화(정유미)와 영수의 첫 만남 직후, 갑자기 이야기를 중단하고 ‘백야’의 세계 밖으로 나온 것처럼 현재의 청계천 위를 트래블링 숏으로 길게 따라간다. 그리고 그 장면은 컬러로 찍혔다. 청계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버린 건물들, 이미 폐허가 된 과거, 그러나 사라지지 못하고 잘못된 자리로 돌아온 듯한 것들. 더없이 낯설고 중층적인 정서로 가득한 풍경을 관망하며 끔찍함과 동시에 괴이한 향수에 젖게 된다. 이 뒤틀린 향수의 정체는 대체 무엇에 대한 그리움일까. 그런 감흥에 빠지는 찰나, 다시 흑백의 세계로 전환한 장면에서 영수는 선화를 대신해서 선화의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주고, 선화는 그걸 읽는다. 그때 화면은 청계천 다리 아래 한 구석에 위치한 카메라가 하루 종일 그곳을 지나가는 실제 시민들을 찍은 컬러의 장면으로 바뀌고 그 위로 선화의 음성이 들린다. 이 장면은 압축적으로 빠르게 아침에서 밤의 시간으로 단숨에 흘러가는데, 거기 흑백의 세계에서 날아온 선화의 고요한 음성, 그 기다림의 정서가 이상한 충돌을 일으킨다. 다시 흑백이 된 장면에서 영수와 함께 연인을 기다리던 선화는 한 소녀에게 건네받은 등불을 들고, 청계천 다리 아래를 무언가에 이끌리듯 한참 동안 걸어간다. 마침내 그녀의 발길이 끝나는 곳에 이 영화의 첫 야외 세트장인 여관이 세워져 있고, 여관 앞에서 세 노인이 앉아 하늘의 별을 보며 믿음을 이야기한다. 미래를 기다리는 과거의 출현 같다. 그런 다음 과거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을 청계천의 진짜 오두막들을 찍은 사진이 삽입된다. 허구와 실재가, 시간과 속도가 충돌하고, 시간의 층위가 한데 충돌하는 장소, 청계천.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는 순간 우리는 가짜가 진짜처럼 믿어지는 게 아니라, 그 진짜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삶과 죽음과 <카페 느와르>

위의 세 지점은 각자의 순간만으로도 충만하지만, 이들이 한 세계 안에서 이뤄내는 조응은 더없이 경이롭다. 특히 초반의 청계천 트래블링 숏과 이후 등불을 들고 청계천을 걸어가는 선화를 따라가는 장면은 어딘지 서로 대응하거나 대치되는 느낌을 준다. 청계천 트래블링 숏이 스크린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러니까 청계천9가에서 1가쪽으로 움직이고, 이후 등장한 선화의 걸음이 화면상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러니까 실제로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때(내가 본 것이 맞길 바란다), 두 방향의 부딪침에서 비롯되는 감흥의 꿈틀거림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둘 중 어느 하나를, 현재와 과거로 단정짓고 싶지는 않지만, 앞선 숏에서 청계천의 쇠락한 풍경을 내려오던 카메라의 반대 방향으로 선화가 총총히 걸어가는 동안 마치 영화는 죽은 신화가 된 청계천의 시간을 기어이 거슬러 올라가는 천사의 발자국처럼 느껴진다. 깃털처럼 가볍지만 이보다 더 결의에 차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두 장면은 말하자면 <카페 느와르>가 생각하는 청계천, 혹은 이 인공천이 상징하는 자본의 도시에 대한 숏과 역숏이다. 그 둘은 하나의 신화를 완성하는 몽타주가 아니라, 그 숏과 역숏 사이에 우리가 망각한 시간과 역사와 이야기를 숨겨둔 어긋나는 몽타주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백야’의 세계가 꿈인지, 또 다른 현실인지 따위의 문제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컬러와 흑백의 전환도 단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니다. 요컨대 영화가 서울의 장소를 컬러로 보여줄 때, 그 색채의 다양성에서 우리가 보는 건 거기 새겨진 자본의 다양성이다. 컬러는 장소에 켜켜이 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의 속도를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이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흑백은 동질성의 세계 혹은 죽음의 색채이기보다는 속도에 훼손되지 않는 빛을 보기 위한 필연적인 어둠처럼 보인다. 딱히 과거라고도, 현재라고도, 미래라고도 할 수 없는, 아니 그 모두라고 말하고 싶은 이 시간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를 통틀어 그 누구도 과거를 기억하려는 자는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만 짐작될 뿐, 그리고 그들은 징후로서만 자신을 드러낼 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 오직 선화만이 기억을 품고 약속을 믿는데, 그녀의 긴 독백은 그 내용 혹은 그것의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잊지 않고 기다린다는 그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준다는 점 때문에 잊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백야’의 경이로움을 지나서도 나는 여전히 영수의 두 번째 죽음을 진심으로 긍정할 이유를 확신하지 못한다. 그것은 희생의 죽음일까, 새 삶의 시작을 알리는 죽음일까, 아니면 그저 또 다른 죽음일 뿐일까. 어쨌든 삶이 아니라면, 이 죽음들에 가치의 위계가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성모 마리아를 닮은 소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친구를 안아주고 나서 남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탄다. 오른다는 것은 내려다보기 위함이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날 내려다보게 하지 않고 내가 내려다보겠다는 딸들의 선언. 무책임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영수의 죽음의 의미를 관념이 아닌 육화된 현실 속에서 찾는 건 어쩌면 내 몫이 아니라 ‘죽어도 죽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 소녀의 몫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어깨가 너무 무겁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고 끝까지 내달려 포기하지 않으려는 <카페 느와르>는 연약한 우리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영화다.

남다은 <카페 느와르>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힘겨웠다. 단순히 이 영화가 난해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앞으로 더 많이 말해질 것이다. 이 글은 그저 그 행렬의 미약한 스타트로 여겨지길.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