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퍼 필름(Caper Film). 범죄행위를 묘사하는 영화를 일컫는 장르명이다. 최동훈 감독이 아내인 안수현 프로듀서와 함께 차린 영화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잠시 웃었다. 이건 일종의 선언이 아닐까? 사기와 도박을 다룬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를 한국적 케이퍼 필름으로 본다면, 그리고 도술로 환영을 만들었던 <전우치>의 행각까지 범죄로 본다면, 최동훈 감독은 이제 앞으로 만들 영화들의 성격을 아예 규정지으려는 듯 보였다. 현재 준비 중인 신작 <도둑들>(가제) 역시 그가 생각하는 케이퍼 필름의 자장 안에 놓인 작품이다. 한국의 도둑들이 중국의 도둑들과 함께 마카오 카지노에 숨겨진 보석을 훔친다는 게 <도둑들>의 대략적인 얼개다. 도둑들 사이에 펼쳐지는 원한과 배신의 음모가 겹겹이 쌓이는 한편, 완벽에 가까운 카지노의 보안시스템을 뚫는 경쾌한 작전 또한 <도둑들>의 활력이 될 듯 보인다. 전작에서 탐구한 사기와 도박의 결이 도둑질이란 또 다른 범죄 안에 한데 모일 것도 당연하다. 대화를 하는 동안 ‘케이퍼 필름’이란 회사명이 더욱 그럴싸하게 들렸다.
-마카오에 다녀왔다고 들었다. =이제 수시로 가야 한다. 도시의 느낌을 보고 싶어서 갔다. 운영진쪽에 이야기해서 카지노의 뒷면도 보려고 했는데, 직원들이 일하는 식당, 직원들이 다니는 통로, VIP룸 정도만 보여주더라. 돈을 보관하는 캐시박스와 구체적인 경호시스템을 알아봐야 하는데… 뭐, 사실 또 그런 내용은 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터라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 같다.
-회사 이야기부터 하자. 제작사 이름이 케이퍼 필름이다. =물론 케이퍼가 작당모의란 뜻이 있고, 그게 내가 만든 영화에도 있는 요소이기는 하다. ‘작당모의’로 하면 좀 이상하니까 케이퍼로 지은 거다. 처음에는 페이퍼 필름으로 하려고 했다. 모든 건 종이에서 시작하니까. 페이퍼와 필름이 영화의 시작이고 끝 아닌가. 그런데 그 이름은 어느 회사가 쓰고 있더라. 아내 이름을 따서 ‘ASH’로 지을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왠지 재처럼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웃음)
-가제로 정해진 신작의 제목은 <도둑들>이다. 왜 ‘도둑놈들’이 아닌가. =여자도 나오니까 도둑들로 정한 거다. (웃음) 나름 페미니즘적인 제목이다. 지금은 가제인데, 진짜 제목은 이상하고 쉽게 지어야 할 것 같다.
여성 캐릭터의 대사를 쓰는 게 재밌더라
-<도둑들>은 언제 시작한 프로젝트인가. =<전우치>를 끝낸 뒤부터였다. 계기는 단순했다. <전우치>를 부산에서 찍었는데, 그때 배가 정박된 항구를 보면서 여기서 도둑질하는 영화를 찍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우치>가 끝난 뒤 바로 이야기를 구상했는데, 마침 3월에 홍콩영화제를 가게 됐다. 그때 이미 이 영화는 한국 배우와 중국 배우가 동시에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작들을 보면 도둑이라는 직업에 대해 평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타짜> 취재할 때, 어떤 분이 그랬다. “도박은 더럽고, 눈물 많은 동네인데 왜 하려 하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도둑놈이 있는데 그 사람이나 만나봐라.” 만나보지는 못했고, 잠깐 이야기를 들었다. 그 도둑은 조세형 못지않은 도둑이었다더라. 그런데 지금은 아파트 경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런 이야기들에서 흥미를 느낀 적은 있었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도둑의 모습이랄까. 프레드 진네만이 만든 <비루먹은 말을 봐라>라는 영화가 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앤서니 퀸이 스페인의 악덕경찰로 나오는데, 교회에 가서 자기가 꼭 범인을 잡고 싶다며 내가 이 교회에 낸 헌금이 얼마냐고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3월에 마카오에 갔는데, 그곳 성당에 앉아 있다가 도둑들이 성당에 와서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장면이 연상됐다. <무간도>도 절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시작 아닌가. 나는 그게 언제나 아이러니했다.
-어떤 도둑들이 나오나. =한국쪽 도둑은 순수한 전문털이범이다. 미술품을 주로 도둑질하는데 이들 중에는 금고를 따는 사람, 바람잡이 등의 기술자가 있다. 중국쪽 인물들은 무장강도다. 이들이 모여 카지노를 터는 이야기다. 카지노가 털리겠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실제 카지노가 털리기도 한다. 대부분 무장강도에 의한 범죄라고 하더라. 쓱 들어가서 훔칠 수 있는 돈은 작은 돈밖에 안되니까. 중심인물은 뽀빠이와 마카오 박이란 인물이다. 뽀빠이는 도둑질로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건물을 산 뒤 손을 털려는 사람인 반면 마카오 박은 재산증식보다는 스릴 때문에 도둑질을 한다. 그외에 생계형 도둑도 나오고 어린 도둑과 늙은 도둑도 나온다. 이들 가운데 여성이 4명이다. 한국쪽에 세명, 중국쪽 일당에 한명의 여성도둑이 있다.
-전작에 비해 여성 캐릭터가 많다. =쓰다보니 여성 캐릭터의 대사를 쓰는 게 재밌더라. 여자가 남자보다 거두절미한 것 같다. 그런 느낌의 대사가 주는 쾌감이 있다. 영화에서 금고를 여는 건 주로 여자들이다. 여성들만이 가진 프렌드십? 그런 것도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멜로도 있겠다. =남자와 여자가 있으니까. X축, Y축으로 다양하게 엮어볼 거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과 염정아가 서로의 본색을 숨기며 벌어지는 멜로신이 3개 정도 있었다. 그때는 밸런스 때문에 뺐는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을 안 빼고 잘해보려고 한다.
-<도둑들>은 돈이 아니라 보석을 훔치는 이야기라고 들었다. =마카오의 그랜드 리스보아를 스탠리 호가 세웠다. 그가 기증한 다이아몬드 2개가 호텔 로비에 있다. 이야기의 출발은 그 다이아몬드였다. 그런데 로비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훔치는 건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보석을 훔치는 걸로 바꾼 거다.
-구성상 <오션스 일레븐>이나 <이탈리안 잡>과 비교할 수밖에 없다. =<오션스 일레븐>은 현대판 동화 아닌가. 11명이 모여서 성공적으로 털고 솟구치는 분수를 보며 뿌듯하게 영화가 끝난다. <도둑들>에는 뿌듯함이 없다. 사랑과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절도판일 뿐이고, 이들이 모여서 한탕하고 찢어져야 하는데, 잘 찢어지느냐 잘 못 찢어지느냐 하는 이야기다. 사실 이런 유의 범죄영화 가운데 최고는 대부분 유럽영화들이다. 줄스 다신의 <리피피>나 <토프카피> 같은 작품 말이다. 물론 그런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해도 나는 또 우당탕탕 찍게 될 거다. 개인적으로 <오션스 일레븐>은 경쾌했지만, <이탈리안 잡>은 재미가 없었다. 도둑이 너무 신 같지 않나.
-도둑들이 벌이는 도둑질은 어떤 스타일로 묘사할 생각인가. <엔트랩먼트>처럼 전자장비를 활용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전자장비 같은 건 없다. 그냥 육체노동이다. 나는 그런 거 안 믿는다. 그렇게 우아한 도둑이 어딨나. 도둑은 다 좀도둑이다. <미션 임파서블>이나 <스니커즈>를 보면 코드를 혼란시켜서 침투하고 그러는데, 왠지 그런 건 좀 가짜 같다. <도둑들>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월담’이다. (웃음) 몰래 잠입해서 조용히 문따고 그런 거지. 이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한국에서 벌어진 보석상 절도사건 관련 기록을 봤는데, 전부 뒷벽을 뚫고 들어가더라. 밤새 뚫어서 훔쳐가는 거다. 감시카메라 같은 건 우산을 펴서 가리고, 경비원은 그냥 때려서 기절시키고. 이 영화의 주제도 따지자면 ‘문단속을 잘하자’다. (웃음)
-<도둑들>에는 전작에서 다룬 사기와 도박이 다 섞여 있을 듯 보인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성동격서’의 전술이 등장한다. <카지노 서베일런스 시스템의 이해>, 이런 책도 열심히 보고 있다. 외국 사이트를 보면 ‘안트워프에서 벌어진 보석도난사건의 실체’, 이런 제목의 심층기사도 많이 있다. 외국에선 기자들이 그런 심층기사를 할리우드에 파는 일도 많더라. 국내에서는, 그래서 범인은 어떻게 됐다는 내용이 많다. 이 영화도 어떻게 훔치냐는 디테일과 함께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영화의 무대를 마카오로 정하고 중국인 캐릭터를 설정한 이유는 뭔가. =첫째는 이야기가 믿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나 신경 쓰는 게 그거다. 한국에도 실제로 금고를 턴 사람들이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일본에 원정 간 사례는 있었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볼 때 외국의 풍광만 보여주면서 한국 사람이 주인 행세하며 돌아다니는 게 낯설 것 같았다. 언어적인 문제도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홍콩이나 마카오 같은 곳을 가서 프로페셔널한 작업을 하는 게 거짓말 같기 때문에, 현지 캐릭터와 엮이는 게 극적 사실성을 높일 것 같더라. 또 하나는 배우에 대한 욕망 같은 거다.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중국 배우가 있지 않나.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해보고 싶은 거다.
<삼총사>나 <보물섬>처럼…
-홍콩과 마카오의 인상은 어떤 거였나. =경이로웠다. 어떻게 이런 건축물로 채워진 도시가 있을까 싶더라. 20층짜리 낡은 아파트들이 바둑판도 아니고 촘촘하게 서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마카오는 카지노를 섭외하려고 여러 곳을 갔다가 본 곳이었는데, 도시의 휘황찬란함이 슬프게 아름답더라. 싱가포르도 가봤지만, 도시가 워낙 건전해서 카지노도 건전한 분위기였다. 또 여기는 14만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한다. 마카오는 19살만 넘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분위기도 있고, 거대한 할렘에 들어간 기분이다.
-전작과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점을 예상한다면. =절도니까 일단 조용하지 않을까? 도박은 으악 하고 지르는 게 있지만 훔칠 때는 시끄럽게 안 하지 않나. 전작보다 배신이 더 많이 들어가 있다. 무엇보다 전작에 비해 플롯이 복잡하지 않을 것 같다. 예전에는 구조에 관심이 많았는데, <도둑들>은 시간순서대로 풀어야만 재밌는 구성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삼총사>나 <보물섬>을 생각해보고 있다. 어떤 일이 있고, 그 일에 참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과정의 이야기인데 그런 고전적인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매혹을 담을 거다.
-<도둑들>은 아내인 안수현 프로듀서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다. 부부가 감독과 프로듀서로 만나는 경우가 꽤 있다. 한국에는 류승완 감독과 강혜정 대표가 있고, 홍콩에는 서극 감독과 그의 아내 시남생이 있다. 어떤 점이 좋은가. =아마 서극 감독은 아내에게 꼼짝 못할 거다. 난 너무 좋다. (웃음) 사람들은 그러다 망하면 둘 다 망하는 거라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하더라. 그런데 감독으로서는 프로듀서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그녀에게 집에서건 밖에서건 보살핌을 받는 게 좋더라.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업도 다른 작품보다 훨씬 더 재밌었다. 티격태격하기도 하는데, 격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더라. 영화라는 게 참 외롭다. 그런 게 동력이 되기도 하지. 안 PD는 나의 개인적인 외로움은 인정해주는 한편, 필요하면 와서 보듬어주는 게 있다. 남편으로서는 잘하는 게 없지만 아내로서는 너무 훌륭하다. (웃음)
‘대화신’을 잘 찍는 게 목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보면서 이렇게 느린 영화가 어쩜 이렇게 재밌을까 생각했다. 제일 재밌는 게 대화신이었다. 크리스토프 월츠가 연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배우들이 말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이 다시 생겼다. <도둑들>에도 한국와 중국의 도둑 10명이 모여 처음 회의를 하는 장면이 있다. 10명이 대화를 하다보니 길다. 시나리오로 4페이지 정도 된다. 중국어, 한국어, 영어가 섞이면서 “쟤가 지금 뭐라는 거냐”고 깐족거리기도 하는 대화다. 훔치려는 장면보다 그런 대화가 영화의 정체를 드러낼 것 같다. <범죄의 재구성> 때는 말을 빨리 하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배우들에게 침 삼키지 말고, 대화할 때 먹지도 못하게 했다. <도둑들>에서는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면서 긴장감이 유지되는, 한신으로서의 완성도를 성취해보고 싶다. 영화를 잘 찍는 감독들을 보면 역시 그런 대화신을 잘 찍는 것 같다.